
나도 20대를 실험실에서 불태웠다. 어쩌다보니 남들보다 오래 다니기도 했다. 처음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별 것 아닌 이유였으나 어쨌든 시작한 이상 열심히 해서 졸업해야했다.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의 막막함이 생생히 기억난다. 논문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실험을 하긴 하는데 어떻게 나아가야할 지 막막했다. 이런 막막한 느낌때문에 대학원 다니는 동안에는 다들 좀 축 처져있다. 친구들이라도 많으면 저녁때 가끔씩 모여서 치맥이라도 하면 좀 낫다 싶지만 그것도 (각자 스케줄이 달라 만나기 어려워질 때가 많아서) 대학원생들에게는 가끔 사치로 느껴진다.
이런 막막한 대학원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대학원을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공감할 이야기이다. 저자는 초반에 본인이 '타대생'이라고 정의하고 '자대생'들은 대단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나오는데, 연구를 막 시작한 대학원생의 이야기 중 <절망편>은 사실 '자대생'도 '타대생'도 겪는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형으로 절망이 찾아온다고 해야 맞을까. 혹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타대생'이 이 글을 본다면, 본인이 '타대생'이라서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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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하는 실험은 학부시절 실험수업에서 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어쨌든 학부수업에서 배운 것들을 기본으로 그 때 배웠던 기법들을 물질 검출이나 분석에 써야하기 때문에 본인의 기술에 자신이 있어야 하고, 물질 합성을 하는 연구를 한다면 학부수업때 했던 합성실험과는 다르게 실패확률이 90%가 넘을 것이다. 이공계 실험 기반의 연구를 한다는 것은, 사실 이런 측면에서는 가학적인 일이다. 남들이 한번도 안해본 일을 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고, 그 성공확률을 높이는 작업을 계속 하다가, 성공확률이 상당히 높아지면 논문을 쓰고나서 또다시 실패확률이 높은 일로 돌아간다. 이런 사이클을 여러 번 하다보면 졸업이 다가온다.
이게 말로 적으면 실제보다 괜찮아보이는 게 문제다. 실제로 매일같이 실패를 마주하다보면 견디기 (정신적으로) 쉽지 않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책하게 되고 스스로 땅을 파게 된다. 이래서 친구가 필요하고, 연구실 사람들끼리 잘 지내면 좋다. 여가생활도 적당히 잘 해가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주어야 한다.
끝도 없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언제 끝나 효자시장에 맥주나 한잔하러 가자" 하는 말 한마디가 어찌나 고맙던지요. 그 하나로 산더미 같았던 설거지도 단박에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 에필로그 중에서.
우리끼리 우스개소리로, 박사를 받는다는 것은 뭔가의 기술을 잘 안다거나, 어떤 것을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어서 받는게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문제를 찾아서 어떻게든 (욕을 하면서라도) 해결해낸다는 증명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실제로 그렇다. 박사들은 뭘 많이 알고있기도 하지만 그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오래된 것이 되기 마련이라 늘 새로 충전해주어야한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해낸다'는 것은 어쩌면 지식이나 기술 이외의 태도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할 것. 해보면서 다음 할 것을 찾을 것. 시작하지 못해 망설이지 말 것."
-'될 지 안 될지는 해봐야 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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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대학원 고군분투기도 책으로 나온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글도 재미있게 잘 썼고.
대학원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 대학원에 막 들어가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특히 좋을 것 같다. '나만 고생하는 게 아니야' 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비록 실제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할지라도, 정서적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나같이 이미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도 읽으면 공감대 형성 엄청 잘 된다. 나도 이럴 때가 있었지. 그리고 현실에 직면한 어려움을 이길 힘을 받기도 하고.
한가지 아주 조금 아쉬웠던 점은, 첫 논문 쓸 때 (특히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인 학생들이) 환장할 것 같은 경험을 하곤 하는데, 그부분이 거의 묘사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너무 매운맛이었어서 그 부분은 빼버린 것일까. ㅎㅎ
『그렇다면 실험실 죽순이가 될 수밖에』
도영실 지음
미래북
20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