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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엔 티파티를 벌여보자



어떤 지역에 몇 주 이상 머물게 되면, 그 곳을 좋아하게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싫은 점들만 눈에 띄어서 거슬릴 때도 있지만, 장기로 머물던 지역에서 이사하게 되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첫인상이 어떻던 간에, <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좋아하는 어떤 작은 구석이 생긴다. 특정 시간의 특정 위치에 비치는 햇살이 좋았던 적도 많았다. ​


여행이란 무엇일까? 새로운 것들을 눈에 잔뜩 넣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먹을 거리와 마실 거리를 시도해보는 그런 것들일까. 평소라면 할 수 없었던 일을 여행이라는 이유로 무모하게 해보는 것. 그런것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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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많이 다녔지만,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2011년에 다녀온 싱가폴 여행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시에 학회 도우미를 하다가 알게 된 싱가폴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놀러가면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늘 이야기했다. 여름 인턴을 하게 되어있던 여름 방학에, 인턴 일정이 시작하기 전 싼 값에 올라온 비행기표를 충동적으로 사서 싱가폴로 향했다. 어디선가 듣자하니, 싱가폴은 여름에 쇼핑하기 좋은 기간이 있는데, 그 직전이어서 비행기표가 쌌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쇼핑엔 관심이 없으니 일단 비행기표가 싼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멀지도 않은 나라지만, 싼 비행기여서 그랬는지 베트남을 경유해서 가는 비행기편이었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여행이라, 유용할 수 있는 자금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대학생이었고). 그래서 숙소는 백패커스를 예약했고, 음식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을 주로 이용했다. 습기가 많은 나라였지만 더워서 하루종일 물을 많이 먹어야 했는데, 현지인들이 가는 마트가 아닌 곳에서는 물 값이 많이 비쌌으므로 매일 배낭에 2리터 정도의 물을 들고 다녔다. 보통은 그 걸 다 마시고, 가뭄에 콩 나듯 음수대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병에 물을 더 채워서 마셨다. 싱가폴에는 비싸고 화려한 휴가를 보내러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렇게 대학생패치해서 싸게 다닐 수도 있다. (ㅋㅋㅋ) 


내가 여행지에 가면 가능한 꼭 가는 곳들이 있는데, 보태닉 가든이나 식물원, 동물원 혹은 아쿠아리움이다. 싱가폴에서는 보태닉 가든하고 동물원, 아쿠아리움에 갔다. 아쿠아리움은 귀여운 물고기들을 본 것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지 않지만, 보태닉 가든과 동물원은 근사했다. 보태닉가든에 들어가자마자, "아 이곳은 열대의 축복을 받은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 종이 아주 다양하고 전체적으로 잘 꾸며져 있는 곳이었다. 특히 거대한 양치식물이 가득한 양치식물 구간이 좋았다. 거대한 고사리같은 양치식물 사이를 걷다보면 마치 물약을 먹고 잔뜩 작아진 앨리스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물원은 사실 내 주머니 사정상 부담없이 갈 수 있었던 곳은 아니었지만, 멀리 왔으니까, 하는 마음에 큰맘먹고 입장해서 저녁 때 하는 나이트사파리 시간까지 놀다가 사파리 열차를 탔다. 동물원에서는 작은 원숭이들이 (마치 미국에서 청설모들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나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슨 동물을 봤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나이트 사파리는 뉴질랜드의 키위새 공원과 함께 여행지에서의 동물 관련한 경험 중 최고를 다투는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야간에 더 활발히 움직이므로, 저녁시간에 동물들이 사는 넓은 지역을 지나는 꼬마기차같은 것을 타고 지나가며 동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크게 신경은 쓰지 않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2인 이상으로 구성된 무리로 사람들이 왔던 것 같다. 나는 혼자 앉아서 씩씩하게 왼쪽 오른쪽 열심히 구경했다. 


나중에 금전적으로 조금 더 여유로울 때 싱가폴에 가게 되면 센토사 섬이나 근처 화려한 호텔에 주로 머물게 될까? 그래도 버스를 타고 싱가폴 섬을 빙 돌았을 때 어쩐지 즐거웠는데. 그리고 나서 버스에서 내려서 아무렇게나 들어간 식당에서 볶음밥을 먹었던 것도. 싱가폴 사람들이 대부분 영어를 쓰기는 하지만,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지역에 들어가면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꽤 있었던 것도 내 예상을 깨는 부분이었다. 차이나타운에서 나와 걷다가 지붕위에 힌두교 신들로 추정되는 조각상들이 수없이 조각되어있는 힌두교 사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보니 누군가의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조각상들이 바글바글 올라가있는 지붕이 좋아서, 그 이후에도 지금껏 가끔씩 생각한다. 신들이 바글바글. 바글바글한 신들과 함께 자란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많이 다르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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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읽는동안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낭만같은 것들이 새삼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학부때까지만 해도 별 일없어도 재미있는 일들을 하고,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놀 때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하지 않고 여유롭게 놀았는데.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스스로를 옭죈 것이 아닌가 싶다. 여전히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작은 낭만 한 조각 품고 살고싶다.


아참. 쓰다보니 글은 온통 싱가폴 얘기지만, 맨 위 사진은 2015년 뉴욕에 갔을 때 (나도) 걸어서 건넜던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찍었다. 뉴욕 여행도 친구들 만나긴 했지만 일정의 절반 쯤은 혼자 씩씩하게 돌아다녔지.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위즈덤하우스

 2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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