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문은 인간 본위이다. 동물을 연구하는 학문도 우주를 연구하는 학문도 결국은 인간의 시선에서 그 논점이 시작되어 인간을 위한 것이 된다. 경제학도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을 위한 학문이며 물리학도 인간이 누비는 환경과 인간이 사는 삼라만상을 연구하고 결국 인간을 위해 더 나은 결과를 내놓기 위한 학문이다. 그래서 굳이 통섭이라는 명칭까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애초 학자들이 자기들의 연구가 모두 인간을 위한 것임을 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만의 틀에 갇혀 살듯이 학자들도 별다를 게 없어 그렇게 경계를 넘어갈 수도 있다고 일러줘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통섭이라고 해서 모든 지식이 어우러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어우러짐이라는 의미인 모양인데, 과연 인문학과의 어우러짐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과의 접점은 모든 장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저자는 자연과학사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인간사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의 바탕에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배어 있다. 그런 저자야 말로 통섭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른 분야의 지식을 머릿속에 함께 담아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그 안에서 인간과의 연계성을 파악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만사가 인간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타인을 비롯한 그 어떤 생명에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연약한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작가의 글에 나까지 마음이 포근해진다.
방방곡곡 많은 신하를 풀어 불로초를 찾게 했던 진시황제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10조 개의 세포 속에 들어 있던 DNA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정자 속에 담겨 자식들의 몸으로 전달된 DNA의 일부는 아마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몸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가능성을 지닌다. 태초에는 보잘것없는 한낱 화학 물질에 지나지 않았던 DNA는 단세포 생물을 거쳐 오늘날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 살아남아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생명의 역사는 한 마디로 DNA의 일대기 내지는 성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p. 162)
자연의 도살 현장에는 언제나 경제주의자 즉 인간중심주의자와 환경주의자 즉 생물중심주의자 간의 각축이 벌어진다. 조금 살만하다 싶을 때에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듯 싶다가 경제 지표가 조금만 나빠지기 시작하면 황급히 인간중심주의의 논리로 복귀하고 만다. 급기야 우리는 열대우림 15곳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이 절멸 위험에 처해 있는 '중요 지점hotspots' 25곳을 지정하여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보전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들을 '하마'라는 뜻의 머리글자 'HIPPO'로 요약한다. 서식처 파괴Habitat destruction, 침입종Invasive species, 오염Pollution, 인구Population, 과수확Overharvesting이 그것이다. 오염과 인구 문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과수확의 문제점은 어민들이 이미 겪고 있다. 토종 개구리는 물론 심지어 뱀까지 황소개구리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걸 기억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심각한 것은 서식처 파괴이다.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때아닌 이념 아래 전 국토가 굴착기의 발톱에 유린당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웃 나라가 토해내는 황사에 기침 잘 날 없는 판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허파를 도려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우선 2005년 12월 21일에 1심의 판결을 뒤엎고 또다시 새만금 개발을 허락한 서울고법 특별4부 판사님들에게 권하고 싶다. 환경 윤리가 왜 단기적인 가치관을 넘어서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얻게 될 것이다. 윌슨은 "우리의 미래 세대는 우리의 만행을 끝없니 반추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p. 214)
저자는 인간이 갖지 못한 현명함을 가진 동물들을 소개하면서 인간의 반성을 촉구한다. 인간과 다를 뿐 인간보다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이 아닌 수많은 생명들이 발전이라는 이름 앞에 스러져 가는 현실이 그로서는 안타깝다.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물건을 들어올리는 개미의 힘이나 집단을 위한 희생을 통해 진정한 영속성을 누리는 꿀벌의 힘,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의 생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미생물,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멸종되어 자취를 감춰가는 세계의 동식물들.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발 밑에 우리가 가지 못하는 드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고, 머리 위로도 갈 수 없는 광대한 세계가 뻗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우리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작은 세계에서 내가 높네 네가 높네 하는 것이 모두 부질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 누가 얄팍한 지식의 틀에 갇힌 이기적인 개구리가 되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리 주변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진화가 우리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과정은 아니다. 자연선택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합목적적으로 진행되는 미래지향적 과정도 아니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학적인 과정도 아니다. 그래서 적자생존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결과는 어쩔 수 없이 완벽한 인간의 등장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은 지나친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처럼 부실해 보이는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단계를 거듭하며 선택의 결과들을 누적시킨 끝에 오늘날 이처럼 정교하고 훌륭한 적응 현상들, 심지어는 남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p. 173)
인류 역사 내내 자연이 우리를 먹여 살렸고, 이제 또다시 우리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나는 21세기를 맞으며 우리 인간이 스스로 '현명한 인간'이라 부르는 자만을 반성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공생인'으로 거듭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우리 인간이 자연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지녔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나는 우리가 현명하다는 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진정으로 현명하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까지 망가뜨리며 살지는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제 꾀에 넘어가는 헛똑똑한 동물일 뿐이다. 하나뿐인 이 지구에서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보고 칼라하리를 어떻게 보전하는가는 우리의 의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금도 칼라하리는 절규하고 있다. 그 절규가 우리의 절규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p. 285)
그러나 그는 미래가 어둡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다. 아마도 어긋난 길을 나아가고 있는 인류의 미래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비록 나는 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지 않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지만, 밝은 내일을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 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미래가 오리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면 정말 아름다운 미래가 올 것 같기도 하니까.
각 장마다 한 권의 책이 메인으로 소개되고, 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두어 권 더 추천된다. 우리가 알지 못한 아름다운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안타까운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다. 마인드맵처럼 이어지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