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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꿈을 찾아 떠나요
  • 불의 기억
  • 전민식
  • 12,150원 (10%670)
  • 2013-03-20
  • : 48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소의 걸음으로 세상을 살았다. -p.140

여러해 전 국립경주박물관을 갔을때 나는 종과 처음 만났다.

내가 그때를 처음 종과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나라 범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때 처음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사찰여행을 통해 여러번 종과 맞닥뜨린 때에도 정작 그 큰 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

박물관에서 알게된 종제작 과정은 소설의 초반부에 자세히 설명되어 나온다.

그 자세함이 어쩌면 소설의 가독성을 떨어뜨릴지도 모르지만 종제작과정은 상반된 주인공 둘의 성격과

두사람이 종을 대하는 철학을 독자에게 심어주기에 유효한 방편으로 저자는 구태여 제작과정을 충실히 서술한다.

 

종은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완성된다고 믿으며 기록과 계산, 통계에 의해 소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규철과 달리

한위는 종을 완성시키기 위한 금속의 배합은 과학보다 신들림에 있다고 믿는다.

종을 대하는 철학이 상반된 두 주인공은 운명과도 같이 한 여인을 사랑하고 비운은 자식에까지 끼치려 든다.

아버지대에 얽힌 운명에 몸서리치며 어떻게든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동주와 해원의 상처는

결말에 이르러 아버지들이 걸어간 선택으로, 그리고 그들을 고스란히 삼킨 종이 들려주는 울림을 통해 씻음받았기를 바래본다.

 

흙이, 쇠가 종을 완성한다지만 종의 본질은 소리로 입증되는 것임에 수긍했던 그들,

일생을 종만들기에서 시작해 종이 만들어 내는 완벽한 소리를 듣고자 했던 그들,

듣지는 못하지만 종국에 불을 빌려 소리가 돼버린 그들을 우린 단순히 광인이라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휙휙 모든 소리를 전자기계로 만들어 내는 세상에서 종소리 따위가 뭐라고. 종의 울림에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치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한위와 규철밖에 없을 것 같았다. -p.139

성덕대왕신종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역시나 전자기계음으로 재생되는 소리를.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서 그 종을 마주했을 때에도 세계에 내노라하는 종의 음각만을 살필 뿐 종이 머금고 있을 소리는 상상해 보지 못했다.

사실 범인의 귀에는 산사에서 울리는 그 종소리가 그 소리인게다.

그러기에 유명한 종이 소리를 울린다해도 특별함을 전해받지 못하는게 당연지사가 아닐까.

이미 숱한 소음에 노출돼 버린 현대인을 상대로 음악도 아닌 생뚱맞게 '종소리'라는 소설의 소재는

독자들에게 과연 어떤 반향을 일으킬수 있을지 개인적으로도 주목된다.

 

규철과 한위가 사랑한 여인 정화의 죽음을 두고 살인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은 끝까지 가독성을 유지한다.

범종이 어떤 과정으로 제작되는지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가운데 초반부를 읽으면 과정을 이해할까 싶은 생각에 회의가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어차피 소설이기에 그 부분은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싶으다.

하지만 보다 소상히 알게 된다면 종 하나에 기울이는 장인들의 열정에 공감을 하게 되고 이에 더해

종소리에 미치는 주인공의 삶이 단지 소설에만 존재하는 허구적 인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리를 얻고자 소리가 돼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나 불이 기억하는건 이들이 여기까지 오며 겪었던 숱한 오열의 시간과

기억이라 불리는 삶의 쳇바퀴일 것이다.

열정 너머의 삶을 살아낸 이들은 불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생전의 집착을 손아귀째 놓을수 있었을테니

그 종소리는 들리는 이들에게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울림으로 지금 이순간 울리고 있지나 않을까 상상을 보태본다.

.

 

일전에 동저자의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를 읽었는데

전작과 전혀 다른 주제와 글체와 느낌의 책이라 앞으로 어떤 류의 글을 써갈지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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