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 480장이 만나서 모이면 1림(ream)이다. 림은 종이를 셀 때 쓰는 단위다. 서점에 있는 모든 책의 종이를 세면 몇 림일까? 종이를 일일이 세는 것은 엄청 힘들다. 종일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종이의 원료는 나무의 섬유질을 추출해서 만든 목재 펄프(wood pulp)다. 펄프가 된 나무들을 모으면 숲(wood)을 만들 수 있다. 서점의 책들은 숲의 흔적이다. 종이책이 된 숲(書林)의 자취가 있는 서점은 서림(書林)이다.
서점은 다양한 종류의 책이 주렁주렁 달린 숲이다. 서점을 찾는 애서가는 책 숲을 마음껏 둘러본다(browse). 종이책이 그득한 서점은 서림이다. 애서가들의 발길이 잦은 서점은 좋은 서림이다. 서림에 매료된 애서가는 서가를 둘러보면서 책을 훑어본다(browse).

미국의 비영리 서점 세미너리 코옵(Seminary Co-op)은 ‘책을 훑어보는 경험’을 만끽할 수 있는 서림이다. 세미너리 코옵을 운영한 제프 도이치(Jeff Deutsch)의 《서점 예찬》은 점점 더 귀해지는 좋은 서점의 특징들을 소개한 책이다. 그는 좋은 서점에 가면 ‘책을 훑어보려는 충동’이 생긴다고 말한다. 훑어보기(browsing)는 책을 곱씹거나 되새김질하는 일이다. 책을 훑어보는 독자는 책을 파고들면서(digging) 먹는 책벌레와 같다. 책벌레는 서림을 갉아먹는 해충이 아니다. 책벌레는 서림을 맛있게 먹을 줄 안다.

* 리디아 데이비스, 서제인 옮김 《세부 속으로: 더 자세한 쓰기, 사라짐의 쓰기에 대하여》 (에트르, 2026년)
* 제임스 우드, 노지양 옮김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삶과 문학, 읽고 쓰기에 관한 네 번의 강의》 (아를, 2025년)
* 제나 히츠, 박다솜 옮김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 내면의 삶을 기르는 배움에 대하여》 (에트르, 2025년)
똑똑한 지성인(知性人)이 좋은 책벌레가 되는 건 아니다. 좋은 책벌레는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찾는 일을 성실히 하는 지성인(至誠人)이다. 바지런한 책벌레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책을 발굴한다(dig). 독자들의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는 평범한 책은 서림에 어울리지 않는 잡초(雜草)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책벌레는 잡초 속으로(Into the Weeds) 스며든다.
소설가 리디아 데이비스(Lydia Davis)는 에세이 《세부 속으로》(원제: Into the Weeds)에서 어떤 것에 신경 쓰이면(bother), 그것을 글감으로 삼아 글을 쓴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책벌레는 신경 쓰이는 주제를 만나면 그 주제와 관련된 책들을 모아서 탐독한다. 독자들이 신경 쓰지 않는 책도 책벌레는 꼼꼼하게 관찰하듯이 읽는다. 외골수 책벌레는 책에 적힌 사소한 단어를 대충 보지 않는다. 단어를 자세하게 파고들어(Into the Weeds) 자신만의 생각을 펼친다.
문학 비평가 제임스 우드(James Wood)는 독자를 ‘침묵의 비평가’라고 했다. 책벌레는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아는 혀(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136쪽)’를 가진 침묵의 비평가다. 침묵의 비평가는 자신만의 잡초(雜抄)를 직접 써서 펼친다. 잡초(雜抄)가 무성한 좋은 서림은 독자들의 잡다한 생각과 취향이 가지가지 피어 있다.
평범한 서점의 주인은 소매업자처럼 일한다. 그들은 책을 판매하는 일에 능숙하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일만 한다. 책을 사는 손님들을 끌어모으려고 서점에 잘 팔리는 책을 갖춘다. 상품성이 떨어지고 수익성이 낮은 책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잘 팔리지 않는 책을 찾는 독자를 하대한다.
좋은 서림의 주인은 애서가, 애독자이자 책벌레 애호가이기도 하다. 애서가는 잘 팔리지 않는 책의 매력을 눈여겨본다. 책을 못 팔아도 크게 아쉬워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은은한 매력이 있는 책을 알아보는 책벌레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책벌레 애호가인 서림의 주인은 쓸모없는 지식이나 주제에 파고든 책벌레를 쫓아내지 않는다. 책벌레의 ‘무용한 공부와 독서’를 북돋아 준다. 공부하는 책벌레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고, 배움을 사랑하는 독자다(제나 히츠,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 226쪽).
서림은 더 많이 배우려고 하는 학생과 같은 독자들을 양성하는 곳(seminary)이다. 세미너리 코옵은 상품성과 수익성을 중시하는 서점이 아니다. 무용한 지식을 공부할 수 있는 서점이다. 제프 도이치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서점 운영 방식을 고수한다. 그는 오히려 책벌레를 좋아하는 서점과 배움을 좋아하는 독자가 지닌 비효율성이 평가절하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세미너리 코옵처럼 ‘현명한 비효율성’을 추구하는 서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좋은 서림의 주인은 책의 판매 부수가 저조해도 책을 훑어보는 책벌레들이 많이 와주길 바란다. 서점 주인은 책을 사지 않는 책벌레가 달갑지 않다. 심지어 책벌레의 관심사와 취향을 무시한다. 하지만 서림의 주인은 책벌레를 ‘서림의 주인공’으로 격상시킨다. 책벌레의 독서 취향이 생소하고, 책벌레의 공부 방식이 서툴러도 지속적으로 격려한다. 서림은 비효율적으로 살아가는 책벌레를 위한 안식처다.


1928년 11월 21일 조선일보에 연재된
벽초 홍명희의 장편소설 《임꺽정》 1회
서림(徐林)은 임꺽정의 책사(策士)다. 관군에게 사로잡힌 서림은 임꺽정을 배신했다. 책사(冊肆)는 잘 팔리는 책들만 진열한(肆) 서점이다. 책사(策士)처럼 행동하는 서점 주인은 만듦새가 부족한 책들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 서림(徐林)이 책사(冊肆)를 운영했으면 독자를 기만하면서 책을 팔았을 것이다.
서림(書林)은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좋은 서림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단 한 명의 독자가 알았으면 하는, 은은한 매력을 지닌 책들의 목록을 만든다. 좋은 서림은 유명한 지식인, 출판인, 북튜버들이 추천한 책들만 진열하지 않는다. 서림을 드나드는 ‘침묵의 비평가’인 무명의 독자들이 추천한 책을 읽고, 큐레이팅한다. 서림에 정직하게 책을 소개하는 주인과 정독하는 독자들이 살고 있다.
《서점 예찬》에 나오는 책을 가지고 있는
cyrus가 만든 주석
[출판사에 관한 주석]
‘니라이카나이’는 2020년에 등록되어 《서점 예찬》을 포함한 총 5권의 책을 만든 출판사다. 니라이카나이(ニライカナイ)는 오키나와섬이 있는 류큐 열도(난세이 제도)의 토착 민족 류큐인(琉球人)의 전통 설화에 묘사된 낙원이다. 이 낙원은 바다 저 멀리 동쪽에, 혹은 바다 밑바닥에 있다고 여겨진다. 오키나와현에 낙원의 이름에서 따온 다리가 있다.

니라이카나이 출판사 대표는 오키나와에서 2년간 생활했는데, 우리나라로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니라이카나이 다리였다고 밝혔다. 그래서 ‘책과 사람을 잇는 다리’와 같은 출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담아 출판사 이름을 니라이카나이로 정했다고 한다.
(출처: 니라이카나이 출판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iraikanai_books/)
책 마지막에 ‘이 책에 나오는 책’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참고문헌 목록이 있다. 서점을 운영한 저자의 추천 도서 목록으로도 볼 수 있는데, 애서가가 흥미를 느낄만한 책들이 포함돼 있다. 목록에 국역본 제목이 없는 책, 저자 이름과 번역자 이름이 빠진 책, 출판사 이름이 잘못 적힌 책이 있다.
* 272쪽

『아리스토텔레스 선집』, 조너선 번즈 [주1]
『도서관』(Library: An Unquiet History), 매슈 배틀스 [주2]

[주1]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 김헌 · 유재민 · 임성진 · 조대호 함께 옮김 《아리스토텔레스 선집》 (도서출판 길, 2023년, 품절)
국역본은 테런스 어윈(Terence Irwin)과 게일 파인(Gail Fine)이 편집한 아리스토텔레스 선집(1995년)을 참고한 책이다. 그리스 고전학자들이 많이 참고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독일의 문헌학자 아우구스트 이마누엘 베커(August Immanuel Bekker)가 편집한 판본(Corpus Aristotelicum,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 1830~1870년)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선집》은 베커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에 실린 주요 저서들의 일부를 발췌해서 번역한 것이다.
[주2] 매튜 베틀스, 강미경 옮김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지식의 생성과 소멸의 은밀한 기록》 (지식의숲, 2016년, 절판)
* 273쪽

『영웅』(On Heroes), 토머스 칼라일 [주3]
[주3] 토머스 칼라일, 박상익 옮김 《영웅 숭배론》 (한길사, 2023년)
* 273쪽

『연설』(Orations), 키케로 [주4]
[주4] 키케로, 전영우 옮김 《연설가에 대하여: 로마의 실천 변론법》 (민지사, 2013년, 절판)

[곧 나올 책] 키케로, 이선주 옮김, 《연설가론》 (아카넷)
* 274쪽

『쓸모없는 지식의 효용』,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주5]

[주5]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 로버르트 데이크흐라프 함께 지음, 김아림 옮김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 세상을 바꾼 과학자들의 순수학문 예찬》 (책세상, 2020년, 절판)
에이브러햄 플렉스너(Abraham Flexner)는 프린스턴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AS)의 설립자이자 초대 소장이다. 학자들이 무용한 지식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순수학문 연구소다. 《서점 예찬》의 역자는 ISA를 ‘고급 학문연구소’로 번역했다. 로버르트 데이크흐라프(Robbert Dijkgraaf)는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로, 9대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소장(2012~2022년)으로 재직했다. 여담으로, 3대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소장은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다.
번역본 제목으로 정해진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는 플렉스너가 쓴 에세이의 제목이다. 이 글은 무용한 연구가 왜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번역본에 로버르트 데이크흐라프의 에세이 『내일의 세계』도 수록되었다.
* 275쪽

『시간 맥동의 비밀』(The Secret Pulse of Time), 스테판 클라인(Stefan Klein) [주6]
[주6] 슈테판 클라인, 유영미 옮김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파헤친 시간의 비밀》 (뜨인돌, 2017년, 절판)
슈테판 클라인, 유영미 옮김 《시간의 놀라운 발견: 시간의 미스터리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시간 사용 설명서》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절판)
* 275쪽

『철학자들의 생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주7]

[주7]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김주일 · 김인곤 · 김재홍 · 이정호 함께 옮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나남출판, 2021년, 전 2권)
* 276쪽

『황금 노트북』, 도리스 레싱 [주8]
[주8] 도리스 레싱, 권영희 옮김 《금색 공책》 (창비, 2019년, 전 2권)
도리스 레싱, 안재연 · 이은정 함께 옮김 《황금 노트북》 (뿔, 2007년, 전 3권, 절판)
* 277쪽

『백과전서』, 드니 디드로, 장 르롱 달랑베르 [주9]

[주9] 드니 디드로, 이충훈 옮김 《백과사전》 (도서출판b, 2014년)
정은주 옮김 《백과전서 도판집》(프로파간다, 2017년, 전 5권)
총 35권으로 구성된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디드로(Denis Diderot)와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가 편집자로 참여했고, 여러 명의 계몽사상가가 7만 개 넘는 항목을 작성했다. 1751년에 1권이 출간되었고, 35권은 1772년에 출간되었다. <백과전서> 서문은 달랑베르가 썼다.
《백과전서 도판집》은 원전 <백과전서> 17권과 ‘과학, 인문, 기술에 관한 도판집’이라는 부제가 달린 도판집 11권을 번역한 책이다. 《백과사전》은 원전 <백과전서> 제5권에 실린 디드로의 「백과사전」 항목 전문을 번역한 책이다.
* 278쪽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유정화 옮김, 민음사, 2018 [주10]
[주10] 저자 이름이 빠졌다. <참깨와 백합>은 존 러스킨(John Ruskin)의 강연문이며 유정화가 번역했다. <독서에 관하여>는 <참깨와 백합>을 번역한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쓴 서문이다. <독서에 관하여>는 불문학자 이봉지가 번역했다.
* 278쪽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수전 손택, 김선형 옮김, 고양, 2018 [주11]

[주11] 출판사 이름이 ‘고양’이 아니라 ‘이후’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와 《다시 태어나다》(김선형 옮김, 이후, 2013년)는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1947년부터 1980년까지 썼던 일기와 노트에 기록된 잡문을 엮은 책이다. 두 권 모두 절판되었다.
* 279쪽

『흑인 소년』, 리처드 라이트 [주12]



[주12] 리처드 라이트, 정병조 옮김, 《흑인 문학전집 1》 (휘문출판사, 1965년, 절판), 수록된 작품명은 『블랙 보이』다.
리처드 라이트, 정병조 옮김, 《블랙 보이》 (미문출판사, 1968년, 절판)
리처드 라이트, 이충률 옮김, 《깜둥이 소년》 (푸른미디어, 1998년, 절판)
* 272쪽

그웬돌린 브룩스(Gwendolyn Brooks) [주13]


[주13] 그웬돌린 브룩스(1917~2000)는 미국의 시인이다. 1950년에 퓰리처상 시 부문(Pulitzer Prize for Poetry)을 받았다. 퓰리처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흑인 문인들의 시와 에세이, 희곡을 모은 《흑인문학전집 5》에 브룩스의 시 3편(「모성애」, 「앞뜰의 노래」, 「그대가 일요일을 잊었다면」)이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