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 밑 세계,
바다 밑바닥의 숲, 가지와 잎사귀,
파래, 어마어마한 이끼, 기이한 꽃과 씨앗, 빽빽한 다시마,
벌어진 틈, 그리고 분홍색 잔디,
다양한 색깔들, 옆은 회색과 녹색, 보라색, 흰색, 그리고
황금색, 물속에 비친 빛의 반짝거림.
(월트 휘트먼, 「바다 밑 세계」 중에서, 황유원 번역)
플라톤(Plato)의 《향연》에 나온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아테네의 유명 인사들을 비꼬면서 당대 현실을 풍자한 희극 작가다. 광장에서 청년들과 대화를 나눈 소크라테스(Socrates)도 아리스토파네스의 조롱을 피하지 못했다.

향연장에서 연설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성(性)이 원래 세 개였다고 주장한다(《향연》 189e).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이 둘을 함께 가진 세 번째 성(androgynon). 시간이 지나면서 세 번째 성은 사라졌고, 이름만 남았다. 하지만 세 번째 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희미한 모습으로 어딘가에 살고 있다. 남성 생식기와 여성 생식기를 다 가진 사람을 자웅동체(hermaphrodite), 양성구유, 남녀추니, 어지자지라고 한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사람은 환대받지 못한다. 이상하게 태어난 인간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미국의 생물학자 앤 파우스토 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은 인간의 성을 다섯 개로 분류하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에 이어 ‘세 개의 자웅동체’를 추가했다. 진성-자웅동체(herms), 남성-가성 자웅동체(merms), 여성-가성 자웅동체(ferms). 학계는 스털링의 견해를 비판했고,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는 분노했다. 훗날 스털링은 ‘다섯 개의 성’을 약간 농담이 섞인 생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다섯 개의 성’은 헛웃음만 나오는 가벼운 농담이 아니다. 스털링은 두 개의 성(남성, 여성)만 존재한다는 이분법과 이성애(Heterosexuality)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정상성에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걸었다.
1993년에 발표된 논문 『다섯 개의 성』(The Five Sexes)이 두 개의 성을 지키는 이분법을 향해 돌을 던진 ‘투석구’라면, 2000년에 출간된 《섹싱 더 바디》(Sexing the Body)는 두 개의 성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투석기’와 같은 책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자신과 적을 알아야 한다(知彼知己). 어린 시절 스털링의 별명은 ‘톰보이(tomboy)’였다. 남자아이처럼 행동하는 여자아이는 인형보다 뱀과 개구리에 흥미를 느꼈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스털링이 평생 도전해야 할 적은 이분법이다.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한 적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분리해서 바라본다. 우리가 ‘정상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입증하려면 ‘남성 대 여성’, ‘섹스(생물학적 성별) 대 젠더(사회가 만든 성별)’, ‘본성 대 양육’으로 형성된 이분법적 범주 안에 속해야 한다. 이분법에 맞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적을 믿고 따르는 세력들의 역공도 대비해야 한다. 이분법의 함정에 빠진 과학자들은 ‘남성 대 여성’과 ‘본성 대 양육’을 입증하기 위해 연구한다. 의사는 성별이 모호한 아이를 수술대 위에 눕혀 ‘교정’한다. 편견에 사로잡힌 전문가들은 자신의 연구 활동이 사회 개선에 공헌한다고 생각한다. 적의 속셈을 간파하려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스털링은 이분법이 적용된 과학이 어떻게 지식이 되는지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을 연구했다.

권위 있는 과학자는 연구 결과를 ‘사실’로 규정해서 ‘지식’으로 만든다. 확정된 지식은 교과서에 자리 잡은 상식이 된다. 과학자는 라투르가 표현한 ‘블랙박스(black box)’에 숨는다. 과학자의 권력이 잔뜩 들어간 지식은 검토 대상에서 제외된다. 대중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과학자의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조금이라도 들어 있는지 숙고하지 않는다. 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가치중립적’이라고 착각한다. 《섹싱 더 바디》는 과학과 문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분리하는 이분법도 비판한다. 과학은 실험실에서만 갇혀 지내지 않는다. 과학은 국가가 지향하는 정책에 반영된 이데올로기, 정부 기관, 연구 자금을 주는 재단을 만나면서 만들어진다.

‘남성 대 여성’ 이분법적 시각을 옹호하는 과학자와 의사들은 자웅동체를 ‘고쳐야 할 연구 대상(환자)’으로 대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한 대로 정상성을 강화하는 의학 지식은 성소수자를 통제하는 규율이 된다. 양성 생식기를 모두 가진 사람은 한 개의 성별로 만드는 교정 수술을 반대한다. 수술 방식이 까다롭고, 수술 이후에 부작용이 생기면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별이 모호한 사람들은 ‘자웅동체’가 ‘의학상 장애가 있는 존재’로 규정하는 용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자웅동체 대신에 ‘간성인(intersex)’이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간성인은 ‘성별이 복잡한 인간’이다.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친 본성(유전자와 호르몬의 작용)과 양육(교육, 외부 환경에서의 경험 등)을 분리해서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둘 중 하나를 무조건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본성 대 양육’ 논쟁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우리는 본성과 양육이 복잡하게 얽힌 삶을 살고 있다. 스털링은 단순히 생물학적 관점에만 맞춰서 몸을 설명하지 않는다. 몸의 동적인 특성에 주목하기 위해 ‘섹스 대 젠더’ 이분법을 해체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철학을 끌어들인다. 우리 몸은 유전자와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다. 외부 환경(의 문화)을 경험하면서 느낀 감각도 신체 발달과 성적 지향의 변화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우리 몸은 섹스와 젠더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체화(embodiment)’[주]된 물질과 같다. 체화된 몸은 고정적이지 않다. 체화된 몸은 ‘섹스 대 젠더’ 이분법과 ‘몸 대 의식(정신)’ 이분법을 거부하고, 안정적으로 변화하는 연속체다.

<Sexing the Body> 국역본은 2020년에 나온 개정판을 저본으로 삼았다. 개정판에 10장 「젠더의 바다」가 추가되었다. 우리는 ‘존재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379쪽)’ 젠더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그러나 젠더의 바다는 ‘젠더만의’ 바다가 아니다. 젠더와 섹스는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그러므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젠더/섹스의 바다’다. 젠더/섹스의 바다를 즐기면 몸과 정신, 자연과 문화의 상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무지개가 피는 바닷속에
셀 수 없는 많은 성과 몸들이 살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책을 구매한
cyrus의 주석
[주] ‘embodiment’는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에 자주 나오는 개념으로, 버틀러의 대표작 《젠더 트러블》에서는 ‘체현’으로 번역되었다.
역자와 편집자들이 저자가 참고한 문헌의 국역본 제목을 표기했다. 잘 만든 책의 특징 중 하나가 세심한 편집이 돋보이는 국역본 표기다. 국역본 표기가 안 된 문헌이 있지만, 책의 완성도에 흠이 될 정도는 아니다.
* 옮긴이 각주, 353쪽
거트루드 스타인은 “장미는 장미는 장미는 장미다”(Rose is a rose is a rose is a rose)라고 말했다.
[국역본] 거트루드 스타인, 신혜빈 옮김 《세상은 둥글다》 (미행, 2022년).
* 미주, 530쪽

싱클레어 루이스의 고전 소설 『애로스미스』 [과학 연구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국역본] 싱클레어 루이스, 유진홍 옮김, 《의사 과학자 애로우스미스》 (군자출판사, 2025년).
* 참고문헌, 602쪽

Angier, N
Woman: An Intimate Geography

[국역본] [절판] 나탈리 앤지어, 이한음 옮김,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년).
[국역본 초판] [절판] 나탈리 앤지어, 이한음 옮김,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 (문예출판사, 2003년).
* 참고문헌, 635쪽

Halberstam, J
Female Masculinity.

[국역본] [절판] 주디스 핼버스탬, 유강은 옮김,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2015년).
* 참고문헌, 651쪽

Laqueur, T
Making Sex: Body and Gender From the Greeks to Freud.

[국역본] [절판] 토머스 라커, 이현정 옮김, 《섹스의 역사》 (황금가지, 2000년).
* 참고문헌, 653쪽

Lewontin, R. C., S. Rose.
Not in Our Genes.
[국역본] 리처드 르원틴 · 스티브 로즈 · 리언 J. 카민 함께 씀, 이상원 옮김,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생물학·이념·인간의 본성》 (한울아카데미, 2023년, 2판).
* 참고문헌, 653쪽

Lorenz, K
King Solomon’s Ring.
[국역본] 콘라드 로렌츠, 김천혜 옮김, 《솔로몬의 반지: 그는 짐승, 새, 물고기와 이야기했다》 (사이언스북스, 2000년).
* 참고문헌, 667쪽

Pinker, S
How the Mind Works.
[국역본] 스티븐 핑커, 김한영 옮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과학이 발견한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와 진화심리학의 관점》 (동녘사이언스, 2007년).
* 참고문헌, 671쪽

Rubin, G
_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_Thinking Sex: Notes for a Radical Theory of the Politics of Sexuality.

[국역본]
게일 루빈, 임옥희 · 조혜영 · 신혜수 · 허윤 함께 옮김,
《일탈: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015년)
1장 「여성 거래: 성의 ‘정치 경제’에 관한 노트」(The Traffic in Women)
5장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
(Thinking Sex).
* 참고문헌, 686쪽

Wilson, E. O.
On Human Nature.

[국역본] 에드워드 O. 윌슨, 이한음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