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점 ★★★★ A-
고전 도서로 채워진 집은 편안하다. 아주 오래전에 나온 고전은 여러 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다. 그래서 고전은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고전의 매력에 푹 빠진 독자들은 고전의 집을 자주 찾는다. 이곳에 모인 독자들은 고전을 함께 읽으며 각자의 감상과 해석을 마음껏 표현한다.
고전의 집은 튼튼하고 오래 간다. 누구나 살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그러나 너무 튼튼하고 하도 오래돼서 문제다. 고전들만 꽂혀 있는 서재는 밀폐되어 있다. 밀폐된 서재는 생각의 성장을 방해하는 ‘책들의 웅덩이’다. 이 웅덩이에 갇힌 독자들은 늘 똑같은 생각을 재차 얘기하면서 살아간다. 생각이 늙어버린 독자들은 고전을 비판하는 해석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경계한다. 고전의 장점을 철저히 보호하려는 독자들은 고전의 집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그들은 ‘고전을 파괴하는 책’이 고전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생소한 주제나 분야의 책들을 멀리한다. 겉은 멀쩡하지만, 내부는 케케묵은 고전의 집은 ‘고집(固執)이 센 고집(古집)’이다.
고전을 색다르게 읽는 행위는 전위적이다. 전위적인 읽기는 고전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고전을 다른 방식으로 건드리는 일이다. 전위대처럼 책을 읽는 독자는 기존에 나온 해석을 답습하지 않고, 이를 과감히 비판한다.
《전위와 고전: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는 황현산 선생의 마지막 프랑스 시문학 강의를 채록하여 정리한 책이다. 고인이 된 선생을 대신해서 쓴 서문은 서로 만나지 못하게 만든 ‘전위와 고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전위’는 고전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들은 고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가짜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시공을 초월해 고전이 내장해 온 정수에 가 닿지 못하는 예술, 그 숨겨진 것을 찾으려는 모험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예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식을 망각시키는 예술을 부정한다.
(「일러두기를 위한 서문」 중에서, 11쪽)
쌩쌩한 전위는 얌전한 고전과 잘 어울리는 단어다. 전위는 쉽게 말하면 다르게 본다는 뜻이다. 전위적인 읽기는 늙은 고전을 좀 더 젊게 만든다. 하지만 고전을 깊이 읽지 않으면서 고전이라는 껍데기만 뒤집어쓴 독자와 전문가들은 ‘다르게 보기’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흑색선전은 성공했다. 고전 파수꾼은 고전을 잘 아는 전문가 또는 작가로 변신했다. 고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출판사들은 ‘초판본 표지’를 씌운 고전들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황현산 선생의 전공은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다. 아폴리네르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준 시인이다. 황 선생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프랑스 근대 시문학의 시작점으로 설정하여 보들레르 이후의 시문학이 두 개의 계열로 나누어 발전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베를렌(Paul Verlaine)과 랭보(Arthur Rimbaud), 아폴리네르로 이어진 초현실주의 계열이다. 이 시인들은 개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으며 논리와 규칙적인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시구를 썼다. 반면 주지주의 계열에 속한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와 발레리(Paul Valery)는 이성의 힘을 믿었고, 단어 하나를 쓸 때도 논리적으로 생각하면서 썼다. 그래서 주지주의 계열의 시를 읽으면 마치 철학자가 쓴 시처럼 느껴진다.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 문학은 ‘전위’에, 주지주의 계열의 시 문학은 ‘고전’에 가깝다. 물론 주지주의 계열의 시인들 또한 전통적인 시작(詩作)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시작법을 시도했으나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인들은 주지주의 계열보다 좀 더 과감하게 시를 썼다. 대부분 문학 연구자와 비평가들은 주지주의 시인들을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시인이 시구에 숨겨 놓은 의미들을 읽을 수 있고, 설령 못 찾는다 하더라도 연구자와 비평가는 그럴듯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는 연구자와 비평가를 당혹스럽게 한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시는 작품성이 떨어진 작품으로 취급받았다. 결국 주지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이 많아지면, 그들이 소개한 문학에 동조하는 문인들이 등장한다. 황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 전후에 국내 영문학자들이 불문학 작품들을 번역하면서부터 주지주의 계열이 문단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초현실주의 계열 시인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덜 알려진 편이며 항상 ‘난해함’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고전에 대한 해석은 자주 반복되면 신선하지 않다. 그래도 독자들은 이미 누군가가 주장한 해석에 의존한다. 그들은 고전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이렇듯 모든 사람이 인정한 해석도 고전 껍데기로 들어가면 ‘틀릴 수 없는 정답’이 된다.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틀릴 수 없는 정답’을 외운다. 이들은 문학을 자유롭게 감상할 여유가 없다. 학교에서 외운(배운) 문학을 전위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
황 선생은 상징주의 시인들의 다양한 매력을 가리는 진부한 ‘고전적인 해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랭보는 ‘전통에 반항한 천재 시인’ 또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묘사한 상징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생전에 랭보 전집 번역 작업을 진행했던 황 선생은 랭보의 문학이 ‘사실주의’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랭보는 첫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발표한 후에 시 쓰기를 그만두었고, 세계 이곳저곳 떠도는 노동자로 살아간다. 황 선생은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 있는 랭보를 주목한다.
고전 작품이 훌륭하다고 해도 전위적으로 읽지 않으면 칙칙한 고전 껍데기를 깨부수지 못한다. 고전 껍데기를 열심히 핥는 독자는 고전의 여러 가지 맛을 모른다. 고전의 여러 가지 맛을 모르고 살아왔음을 스스로 인식한 독자는 전위적인 독서를 한다. 전위적인 독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고전 껍데기를 버리고, 고전 알맹이를 자유롭게 검토한다. 황 선생은 자신의 트위터에 “자유롭게 검토할 지성이 없으면, 제가 잘났다고 뽐내는 일밖에는 다른 일이 불가능하다”라는 글을 남겼다.[주1] 고전을 자유롭게 생각할 힘이 없는 독자는 텅텅 빈 고전 껍데기를 요란하게 흔든다. 요란한 독자는 자기가 잘났다고 뽐낸다.
[주1] 2015년 1월 11일 트윗. 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2014-2018 황현산의 트위터》 (난다, 2019년), 110쪽.
<전위대처럼 책을 읽는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21쪽

보를레르 → 보들레르
* 28쪽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848~1916) [주2]
[주2] 몰트케의 생몰 연도가 잘못 적혀 있다. 독일의 군인 헬무트 폰 몰트케는 두 명이다. 보불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 군의 참모총장 몰트케는 1800년에 태어나 189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와 이름이 같은 조카 헬무트 폰 몰트케(1848~1916)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제국 군을 지휘했다. 두 몰트케를 구분하기 위해 보불 전쟁에 참전한 몰트케를 ‘대(大) 몰트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조카를 ‘소(小) 몰트케’로 표기한다.
* 195쪽

아무렇게나 말해 버림으로써, 계산하지 않음으로써 의미가 돋보이지 않고 노래만 남게 하는 방식으로 시를 만듦니다.
만듦니다. → 만듭니다.
* 225쪽

영국의 주지주의로 데이비드 흄, T. S. 엘리엇 등이 있다. [주3]
[주3] 20세기 영국 문학의 유파인 주지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등장했다. 흄의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영국 경험론을 완성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다. T. S. 엘리엇(T. S. Eliot)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영국의 주지주의자는 T. E. 흄(T. E. Hulme, 1883~1917)이다.
* 398쪽

아폴리네르가 태어난 날짜는 8월 26일이다. 갓 태어난 아폴리네르의 세례명을 지어준 성당의 영세부에 적힌 아폴리네르의 출생 날짜는 8월 25일이다.

[참고 문헌]
* 아폴리네르, 황현산 옮김, 《알코올》 (열린책들, 2010년)
「기욤 아폴리네르 연보」 337쪽
* 황현산, 《아폴리네르: 『알코올』의 시 세계》 (건국대학교출판부, 1996년)
* 파스칼 피아, 황현산 옮김, 《아뽈리네르》 (열화당,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