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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토요일.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이날에만 내가 보고 싶은 연극이 무려 세 편이나 상연된다. 연극 한 편은 서울에서, 두 편은 대구에서 한다. 공연이 시작되는 시간이 겹치는 데다가 서울과 대구를 오고 가는 시간도 부족하다. 결국 서울에서 하는 연극은 포기하고, 대구 연극 두 편을 관극(觀劇)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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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에 가서 보고 싶었던 연극은 일본 극작가의 작품이다. 매년 이맘때에 일본 극작가의 희곡 작품을 낭독극 형식으로 선보이는 ‘현대 일본 희곡 정기 공연’이 있다. 2002년 도쿄에서 시작된 정기 공연은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한다.
*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엮음 《현대일본희곡집 7》 (연극과인간, 2016년)
* 기타무라 소, 김유빈 옮김 《호기우타》 (지만지드라마, 2024년)
이번 공연에 공개되는 극작품은 마쓰이 슈(松井周)의 <지하실>과 기타무라 소(北村想)의 《호기우타》(寿歌)다. 공연 장소는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이다. 낭독 공연은 어제 금요일에 시작되었고, 첫 공연작은 <지하실>이었다.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연속으로 연차를 쓰지 못하는 바람에 금요일에 상연된 <지하실>을 보지 못했다.
* 윤영선, 윤성호 《죽음의 집》 (책공장 이안재, 2022년)
<지하실>을 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의 연출가와 출연 배우 때문이다. <지하실>의 연출가는 윤성호다. 작년에 내가 소극장에서 관극한 《죽음의 집》을 쓴 극작가다. 《죽음의 집》은 2007년에 세상을 떠난 극작가 겸 연출가 윤영선의 미완성 희곡이었는데, 윤성호가 완성했다.
* 나탈리 사로트, 이광호 · 최성연 옮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지만지드라마, 2023년)
<지하실>의 출연진 명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박세인 배우와 문가에 배우다. 박세인 배우는 희곡 전문 가게 <인스크립트> 공동 대표다. 2023년 12월, <인스트립트>에서 역사적인 첫 번째 낭독극 공연이 진행되었는데, 작품은 바로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의 2인극 《아무것도 아닌 일로》다. 박세인 배우와 문가에 배우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공연의 ‘페어(pair)’로 만났고, 나는 두 배우의 낭독극을 관극했다.
공교롭게도 연희동에서의 <인스크립트>의 삶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인스크립트> 시즌 2는 다음 달부터 혜화동 대학로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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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2년마다 대구에서 ‘원로 연극제’가 펼쳐진다. 대구 경북에서 활동하는 원로 연극배우들과 젊은 배우들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연극 축제다. 지난주에 이미 첫 연극 작품이 무대에 올랐는데, 경주 출신 극작가 손기호의 <복사꽃 지면 송화꽃 날리고>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 공연을 봤다.
* [품절] 손기호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연극과인간, 2020년)
<복사꽃 날리면 송화꽃 지고>는 2011년 서울 연극제 대상 수상작이다. 손기호의 희곡집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에 수록되어 있다. 이 희곡집에 표제작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와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가 실려있는데, 세 극작품은 경주를 배경으로 한 ‘경주 3부작’으로 알려져 있다. <복사꽃 날리면 송화꽃 지고>는 경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극 중 인물들은 사투리를 쓴다. <복사꽃 날리면 송화꽃 지고>는 노부부의 소탈하면서도 정겨운 대화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 배삼식 《화전가》 (민음사, 2020년)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셰익스피어 전집 10: 소네트. 시》 (민음사, 2016년)
‘원로 연극제’ 두 번째 작품은 배삼식의 《화전가》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경북 안동의 어느 시골에 환갑을 앞둔 ‘닭실할매’ 김 씨를 위해 두 며느리와 세 자매는 환갑 잔치 대신에 ‘화전놀이’를 준비한다. 여인들은 술을 마시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나눈다. 《화전가》는 김 씨의 막내딸 봉이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소네트 15번을 읊으면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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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매한 <화전가> 공연은 오후 3시에 시작된다. 이 작품을 다 보고 나면 달서아트센터로 이동해서 저녁 7시에 하는 중국의 고전 잡극(雜劇) <회란기>를 관극한다. <회란기>는 서울시극단 단장 고선웅이 연출했다. 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연극을, 그것도 대구에서 오늘 하루만 하는 연극을 놓친다는 건 ‘연극쟁이’로서 어리석은 일이다.
* 이잠부, 문성재 옮김 《회란기》 (지만지드라마, 2019년)
※ 흰색 표지로 된 구판은 2012년에 출간됨, 당시 출판사는 ‘지식을만드는지식’
<회란기>의 원제는 “포 대제가 슬기롭게 석회 동그라미로 판결을 내린 이야기”라는 뜻의 <포대제지감회란기>(包待制智勘灰闌記)다. 포 대제는 ‘판관 포청천’으로 알려진 포증(包拯)이다. 포청천은 포증의 별명이다. <회란기>의 포 대제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친자식마저 빼앗기는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제한다.
기생 출신의 장해당은 졸부 관리인 마균경의 첩이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수랑’이라는 이름의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다. 반면 마균경의 본처 마 부인은 자식이 없어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마 부인은 남편 몰래 관청에서 일하는 조 영사(令史)와 바람을 피운다. 두 사람은 마균경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마 부인과 조 영사의 계략에 걸려든 장해당은 간통녀로 오해를 받아 남편에게 학대당한다. 해당은 국 한 사발을 마균경에게 대접하는데, 마 부인은 국에 독약을 몰래 넣었다. 해당은 졸지에 남편을 독살한 과부가 되었고, 마 부인은 남편의 유산과 해당의 아들을 차지하기 위해 송사(訟事)를 신청한다. 마 부인과 조 영사는 송사에 이기기 위해 해당의 출산을 도운 산파들과 관아의 관리들을 매수한다. 궁지에 몰린 해당은 모진 고문을 받게 되고,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한다.
해당은 개봉부의 사령(使令)으로 일하는 친오빠를 우연히 만난다. 개봉부는 포 대제가 근무하는 관청이다. 해당의 친오빠는 누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포 대제에게 판결을 의뢰한다. 개봉부에서 다시 만난 장해당과 마 부인. 포 대제는 석회로 바닥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그 안에 아이를 세우게 한다. ‘하얀 동그라미’는 진짜 친엄마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한 장치다.
* 한국브레히트학회 엮음 《브레히트 선집 1, 2, 3》 (연극과인간, 2015년)
※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희곡 선집 3권에 수록됨
1924년 독일에 처음으로 번역된 <회란기>의 번안 제목은 ‘하얀 동그라미’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포 대제의 재판 장면을 재해석한 희곡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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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연 관극을 위해 어젯밤부터 뜬눈으로 한국, 중국, 일본 희곡을 전부 다 읽었다. 이렇게 희곡을 몰아서 읽는 것도 흔치 않다. 게다가 놀라운 사실은 세 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와 연극을 만든 연출가 모두 브레히트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지하실>을 번역한 연극 전문 번역가 이홍이는 2015년에 상연된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번역했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의 연출가 정철원(극단 한울림 대표)은 대구시립극단 예술감독 시절인 2021년에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 엄마와 그 자식들>을 연출했다.
극작가 배삼식의 데뷔작은 1998년 <하얀 동그라미>다.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각색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