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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썅마이리딩-천의 얼글
  • 딕테
  • 차학경
  • 16,200원 (10%900)
  • 2024-11-28
  • : 60,710




4점  ★★★★  A-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월의 세계문학









얼떨결에 하와이에 불시착한 테레사(Theresa). 아시아의 변방으로 알려진 한국에서 온 소녀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아늑한 집, 듬직한 어버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나오는 말(母語). 어디서 잃었는지 소녀는 모른다. 불안해진 소녀의 조그마한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는다. 테레사는 외로움과 추위에 떨었다. 소녀를 움츠리게 만드는 하와이의 차가운 바람은 어디서 부는 것일까.







테레사의 괴로움에 이유가 있다. 소녀는 혼자다. 커다란 하와이는 육첩방과 같은 남의 나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도. 혼자서 아픔을 참다가 병원에 온 테레사. 그러나 의사는 소녀의 병을 모른다. 그녀한테 병이 없다고 한다. 지나친 시련, 지나친 피로. 하지만 소녀는 성내서는 안 된다. 테레사, 불쌍한 테레사. 끝없이 침전하는 테레사.


인생살이가 어렵다던 윤동주 시인은 시가 쉽게 써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고달픈 인생살이를 너무 일찍 깨달은 테레사도 손쉽게 글을 쓰지 않았다. 그녀가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한 일이다. 어른이 된 테레사는 여러 번 쓰다가 하와이의 바닷모래로 덮어 버린 자신의 옛 이름을 찾았다. 차학경(Hak Kyung Cha). 어머니의 말(母語)에서 태어난 이름이다.[주]


차학경의 첫 번째 책 《딕테》(Dictee)는 가족과 고향의 추억을 되새긴 앨범이요, 회상록이다. 《딕테》는 눈으로 ‘읽는’ 책이면서도 눈으로 ‘보는’ 책이다. 이 책에 차학경의 아버지 차형상이 직접 붓으로 쓴 글씨와 어머니 허형순의 사진이 있다. 차학경은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을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녀는 왜 텍스트 곳곳에 이미지를 넣었을까. 그녀는 말하기가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차학경은 자신을 ‘말하는 여자(diseuse)’로 지칭한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다. 낯선 언어를 억지로 만나면 입과 혀의 활기가 없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언어는 ‘나’라는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차학경에게 이미지는 책을 쓰기 위해 활용된 비언어적 표현 수단이 아니다. 본인의 정체성과 다양한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시할 수 있는 제2 언어다.







차학경은 남의 나라에 적응하기 위해 남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 쓰면서(Dictee)’ 성장했다. 포근한 어머니의 말에 익숙한 혀는 차가운 남의 언어가 닿는 순간, 바로 얼어버린다. 목젖은 닫힌다. 웅크린 목소리는 목구멍으로 들어간다. ‘말하는 여자’가 되고 싶은 차학경은 ‘남의 말과 비슷한 것’을 뱉어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 나오는 것은 단어들이 어설프게 만나서 생긴 비문(非文)이다. 남의 나라 사람들은 이방인의 어설픈 말을 듣지 못한다.


어머니 차형순은 차학경에게 말하기와 글쓰기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려준 스승이다. 그래서 차형순은 《딕테》를 태어나게 한 할머니이자 산파다. 이 책의 2장 「칼리오페 서사시」는 어린 차학경이 소중하게 여긴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텍스트다. 어머니, 모국어, 고향은 차학경의 삶에서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바로 당신의 언어를 말합니다. 당신 자신의 언어. 당신은 아주 부드럽게, 속삭여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국어는 당신의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진정으로. 


(56쪽)



‘말하는 여자’는 자신이 누군지 떳떳하게 말할 줄 아는 인간이다. 그리고 자유와 존엄성을 말살하는 세상에 거세게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차학경은 남성에게 복종하는 여성을 양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유관순과 잔 다르크(Jeanne d’Arc), 가톨릭 성인 테레즈 수녀(Thérèse de Lisieux, 리지외의 테레사, 小花 데레사)를 소환한다. 이 세 사람은 차학경보다 먼저 태어났다. 그녀들은 어린 나이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식했으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실천했다. 1장 「클리오 역사」(유관순), 5장 「에라토 연애시」(테레즈 수녀, 잔 다르크)는 주체적인 여성의 삶과 목소리를 재구성한 글이다. 차학경은 이 글을 통해 자신 또한 그들처럼 살아가겠다고 천명한다.


《딕테》는 작가가 소중하게 여긴 것들을 모아 놓은 보석함과 같은 책이다. 어머니와 모어는 굳어 있던 작가의 입과 혀를 살아있게 해주는 생명력이다. 작가는 한국을 떠나면서 놔두고 온 어머니와 모어를 되찾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 누군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미국 사람이다. 한국에서 ‘차학경’으로 태어나 ‘테레사’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미국에 정착한 디아스포라(Diaspora)다. 글 쓰는 작가이자 비디오 아트(Video art) 예술가였다. 어머니와 모어는 풍요로운 정체성을 지닌 ‘테레사 학경 차’로 성장하게 만든 힘이다.





[주] 숨은 윤동주 찾기. 글의 첫 문단부터 세 번째 문단까지의 글은 윤동주 시인의 시구(밑줄을 친 부분)를 엮어서 썼다. 내가 인용한 시는 <쉽게 씌어진 시>, <길>, <바람이 불어>, <간>,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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