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와 요리사들』(이하 『요리사들』)을 처음 꺼내 들었을 땐 가볍게 즐길 만 한 코지 미스터리’ 정도를 생각했습니다. 가혹한 ‘전장’에서 ‘사랑스러운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라는 홍보 문구 덕분이었죠. 이 소설의 주인공 티모시(팀) 콜이 전쟁에 출전하기까지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룬 프롤로그를 읽을 땐 이런 심증을 굳혔어요. 요리에 관심 있는 소년. 그러나 진짜 남자로 가고 싶은 청년. 결국 이 때문에 군에 입대하는 주인공.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 심증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요리사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전쟁, 나아가 전쟁 속 참상에 대한 묘사예요. 그 참상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 또한 허투루 지나치지 않아요. 어제 얼굴을 맞댄 사람들이 오늘의 폭격으로 세상을 떠난 상황,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 죽은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들, 그 참상 속에서 겪는 고통을 담담한 듯 그러나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어떤 부분에선 읽기가 힘들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내요. 하긴,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 이런 걸 지나친다면 기만적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새삼스레 생각났다. 불길에 휩싸인 채 낙하한 공수병,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유도병, 구호소에서 그저 죽음을 기다리던 부상병. 지금까지 정신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몰랐지만 내가 그렇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은 그저 우연히 제비뽑기에서 당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번 뽑을 제비는 백지일까, 아니면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을까? 궁둥이 언저리에 소름이 돋고 몸서리가 났다. 82
이 소설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만 치중했다면, 『요리사들』을 읽고 느낀 울림이 이렇게 크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 좀 뜬금없는 타이밍이긴 하지만 네, 맞아요.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감동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책을 손에서 떼어놓질 못했어요. 그리고 그 이유는 이야기 곳곳에 적절하게 녹아든 가벼움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팀이 동료들과 티격태격하는 장면들, 때로는 동료와 갈등하면서 때로는 어울리는 모습들.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관통하면서도 그들은 ‘삶’을 살고 있었어요. 일상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곧잘 잊는, 그러나 기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말이죠.
『요리사들』 속 이 미스터리는 더욱 감동을 부추기는 요소로 다가옵니다. 사실 처음엔 어리둥절했어요. 분량으로 보나 깊이로 보나 이야기의 대세를 좌우할 만 한 무게감이 이 책의 미스터리에서는 느껴지지 않거든요. 미스터리 마니아들에겐 조금은 싱겁게 느껴질 법할 정도죠. 그러나 이내 『요리사들』의 미스터리를 트릭의 정교함이나 흥미만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수수께끼가 눈앞에 뒹굴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풀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나? 사실 난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아주 좋아해서 말이지. 그 안경 쓴 유대인 청년은 그야말로 명탐정 같았지. 분말 달걀 외에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워낙 입이 무거워야지” 483
『요리사들』의 미스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풀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소설 후반부에서 전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독일 사람들을 향해 비인간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던 팀 콜은 그러나 끝내 인간다움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미스터리를 풀어가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최근 세계 곳곳에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만연하면서 인간성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옵니다. 누군가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누군가는 극우주의자가 되어서 주변 사람들을 해치고 있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을 가른 채, 온갖 비윤리적인 폭언을 쏟아내는 사람들. 인간성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요리사들』의 사람들은 비극에 갇힌 괴물로 남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끝내 인간성을 지켜내죠. 사람다움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요즘, 마음 따뜻해지는 사람들을 만난 덕분일까요?『요리사들』의 감동이 꽤나 오래 이어질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