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리처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혹은 잭 리처를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 사람이 자로 잰 듯한, ‘정석’ 같은 인물이란 겁니다. 말투나 행동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죠. 심지어 생각까지도 그렇고요. 리 차일드 또한 이런 인물상을 작정하고 만든 듯한 느낌이고요. 잭 리처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묘사를 위해 동원한 문장들은 이런 인상을 더욱 깊숙이 새겨넣어요.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끊어치는 단문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잭 리처의 이 기질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20년 전에도 여전합니다. 1996년 어느 날 아침, 중대한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잭 리처는 그러나 '강등'을 떠올리게 할 만한 곳으로 전출됩니다. 여느 인물이었다면 한동안 빈정을 상한 채 분을 삭이지 못하겠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수습하고 자로 잰 듯한 추리로 여기에 자기가 왜 왔는지 금방 깨닫게 돼요. 이렇듯 소설은 잭 리처의 제일 중요한 매력 포인트와 함께 시작을 알립니다.
이후에도 잭 리처는 여느 범죄소설의 수사관이 그러하듯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리력으로 진실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초창기 단서들만 놓고 보면 정말 쉽지 않은 사건이었어요. 용의자만 해도 20만 명이 넘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니, 이걸 어떻게 잡아.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잭 리처는 해냅니다. 수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자를 특정해내면서 수사의 국면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죠. ‘믿기지 않는’ 추리력이 ‘억지’가 아닌 ‘탄성’으로 이어졌던 건, 개연성 또한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이거야!” 이 말을 몇 번 외쳤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범죄소설로부터 기대했던 그 쾌감을 『나이트 스쿨』은 초반부터 전해주죠.
그러나 『나이트 스쿨』의 진짜 매력은 칼 같은 추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반대로 칼 같은 추리가 자꾸만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빅 꿀잼’을 전해주었죠. 이 작품에서 유일한 전지전능한 존재인 리 차일드(!)는 마치 잭 리처를 작정하고 골탕 먹이려는 듯 뜻하지 않은 인물과 사건을 쏟아냅니다. 더군다나 잭 리처는 이런 일들을 절대 알 수 없었어요. 그렇게 잭 리처가 알지 못하는 인물이 나타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의 추리는 자주 샛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검거를 자신하던 상황에서 눈 뜨고 용의자를 놓치는 대목이라든지, 도시를 탈출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은 애먼 곳을 수색했던 순간이라든지. 물론 읽는 순간엔 안타까웠죠. 이 말을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아니야!”
잭 리처의 헛발질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재미’의 측면입니다. 범죄소설의 전해주는 쾌감의 본령은 누가 뭐래도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일 겁니다. 물론 『나이트 스쿨』이 전하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끝내 잭 리처는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을 잡아내니까요. 그러나 잭 리처가 진실에서 멀어질 때 순간 또한 즐거움을 전해주는 대목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안타깝잖아요. 범인을 못 잡을 것 같아서 긴장하게 되잖아요. 이건 뭐랄까, 소설에서 눈을 못 떼게 하는 기본적인 감정들이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사람이 제아무리 용을 쓴다 한들, 제 눈으로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선 결국 까막눈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3의 인물, 또는 다른 범인이 등장하니까 그 기똥찬 잭 리처도 고꾸라지잖아요. 어디 잭 리처뿐인가요. 가령 2년 전만 해도 2017년 11월 이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지금의 그 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때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면 틀림없이 나사 빠졌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을 겁니다. 꽤나 뜬금없고 지나치게 철학적인 해석이지만, 사람의 이성이 이렇게 무기력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어쨌든 결론은 추리와 헛발질, 미스터리, 박진감, 개연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심오한 함의도 품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가 좀 별점에 후한 편이긴 한데, 네 개는 먹고 들어가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말인즉슨 이 책에 그 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는 분들께 망설임 없이 권할 책이란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 덧. 개인적으로 이 책의 사이즈가 참 좋더군요. 손으로 잡기에도 좋을 뿐더러, 책 읽는 기분도 한껏 냈어요. 더 많은 범죄소설 작품들이 이 사이즈로 나왔으면 하는 희망을 미약하게나마 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