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크레이스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 봄 『투 미닛 룰』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사실 처음엔 이 작가에게 그렇게 호감이 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딱히 이유를 꼽기는 어려운데, 굳이 찾자면 아마도 표지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요. 8년 전 표지에 대해 위화감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이유로 『투 미닛 룰』은 책장 안에서 대기를 타고 있었죠.
이 책이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꺼내들었던 건 책을 산 지 10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책을 덮었을 때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어요. 왜 때문에 젠장, 이런 책을 안 읽고 있었던 거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넘쳐나는데요. 범죄소설로서의 완성도야 말할 것도 없었어요. 사실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른 작가라면, 이 정도도 못해내는 게 더 이상하니까요. 결정적인 계기는 캐릭터였어요. 마음 따뜻한 은행털이, 범죄자를 돕는 전직 FBI 요원. 자칫 유치해지기 쉬운 그들의 마음가짐을, 너무나 완벽하게, 그리고 읽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그려놨던 겁니다.
이 작가의 신작 『L.A. 레퀴엠』의 출간 소식을 듣고 또 이벤트에 응모했던 이유는 당연히 "공짜 책"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저 가슴에 손을 얹고 얘기하고 있어요. 세상만사 기쁨과 슬픔을 범죄소설에 어떻게 녹여냈을까, 기대했고 읽고 싶었거든요. 번쩍 손을 들었고, 운이 좋게 책을 받아들게 되었네요. (이런 운이라도 있어야죠.)
시작은 좀 기대와 달랐습니다. 이야기가 이상했던 건 아니었어요. 각별한 인연의 독지가의 딸이 죽고, 함께 일하는 파트너 조 파이크와 엘비스 콜이 사건을 의뢰받고, 알고 보니 그 독지가의 딸이 조 파이크와 연인 사이였고,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는. 사건 자체는 기대를 품게 했습니다. 다만 문제는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네요. 대사도 누구의 것인지 일일이 찾아봐야 했고, 문장만으로는 얼개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거든요. 초반은 좀 아귀가 맞지 않는, 서툴게 쓰였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중반 이후부터는 만듦새도 분위기도 달라집니다. 범인이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인물들은 하나둘 무언가를 잃어갈 위협에 시달립니다. 가령 범인으로 지목받는 조 파이크가 대표적인 경우죠. 예전 애인을 잃었는데, 누명까지 쓰게 되었으니 말이죠.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았던 조 파이크도 행동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마냥 뻣뻣하게만 느껴졌던 이 인물이 좋은 의미에서 느슨해져요. 반면 애당초 이런저런 감정이 풍부했던 엘비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애인 이상의 존재인 조 파이크를 잃게 되고, 그 뒤로도 무언가를, 누군가를 꾸준히 잃어갑니다. 당연히 읽는 사람도 위기감을 느끼게 되죠.
이 소설이 좋았던 것은 인물들의 위기가 범인의 위협에만 빚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이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헛발질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구체적인 예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이라면 어느 순간, 엘비스 콜의 선택을 눈여겨보시기를 권하겠습니다. 사건의 종료 이전까지 거듭되는 실패 또는 비극은 많은 물리적인 불가항력에서도 비롯되지만, 또한 관전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하지만 당사자는 저지를 수밖에 없는 헛발질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L.A. 레퀴엠』이, 끝없이 사람이 죽어 나가고 또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이곳의 독자 입장에선 "가깝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어요.
후반부, 엘비스 콜이 한 LA 경찰과 함께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범죄소설에서, 그것도 주인공 남자가 우는 모습은 참 특이하죠.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살짝 함께 울었어요. 어떤 말로 이 책에 대한 감정 또는 감상을 요약하라고 한다면, 저는 이 순간을 말씀드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