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익 작가의 『종료되었습니다』(『종료』)를 읽었을 때 떨림이 아직까지 선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장르소설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쓰는지 궁금해서 무심결에 꺼내 읽은 책이었는데, 다 읽었을 때 마음은 결코 무심하지가 않았어요. 매끈한 문장에, 플롯의 이음새도 정말 좋았는데, 무엇보다도 완벽한 반전이 이 소설을 강렬하게 만들었습니다. 좀 오버하자면, 나는 이 소설이 우리말로 쓰였다는 게 신기했을 정도였죠. 따로 말한 적은 없지만, 작가에게 혼잣말을 건넸더랬다. ‘다음 작품 쓰기 좀 부담스러우시겠어요.’ 후속작인 『선암여고 탐정단 - 방과 후의 미스터리』(『탐정단』)는 아마 작가도 외면할 수 없었을 그 부담의 결과물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마치 작정한 듯 『종료』와는 다른 이야기를 쓴 것 같습니다. 작품의 배경과 톤,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 모두가 다르죠. 조금 냉소적이긴 하지만 평범한 고등학생인 주인공 채율, 비롯해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선암여고 미스터리 탐정단’ 단원들. 이건 누가 봐도 아무리 봐도 ‘코지 미스터리’가 분명했어요. 살해당한 어머니를 잊지 못한 주인공에게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다는 설정의 『종료』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를 수밖에 없었죠. 저는 ‘자기복제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인가?’하고 생각했어요. 이 어리둥절한 변신을 어떻게 여겨야 할지 몰라 조금은 혼란스러운 채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쌍둥이이자 천재인 오빠만 챙기는 엄마에게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채율은 외고 시험에 응시하지만 ‘탈락자 중 1등’이라는 성적으로 탈락하고, 선암여고에 진학합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는 학생이죠. 선암여고는 그저 그런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고, 그래서 채율에게는 유학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율이 변태 같은 괴한에게 팔을 물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선암여고 미스터리 탐정단’이라는 아이들이 채율을 찾아오죠. 탐정단을 처음 만난 채율은 속으로 비웃지만, 사건은 의지와 다르게 굴러갑니다. 어찌어찌 ‘고문’ 직함을 얻게 되었고, 이후 떠밀리듯 수사에 참가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이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이 소설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가 ‘성장담’이었다는 점입니다. 작품 초반 채율에게 탐정단, 나아가 학생들은 그저 ‘스쳐 지나는 바람’일 뿐이었죠. 그러나 채율은 사실 냉소로 반항하기만 했을 뿐,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할 줄은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자퇴 후 유학도 실은 엄마가 짜놓은 큰 그림에 불과했고, 채율의 목표 또한 그런 엄마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었죠. 그러나 냉소는 결국 순응과 다르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결국 자기 갈 길을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또한 사람과 어울리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점도 깨닫게 되죠.
더욱 재미있는 건, 추리 과정이 재미를 더하는 과정일뿐 아니라 채율을 성장시키는 요인었다는 점입니다.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채율은 자기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람과 부대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못마땅했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쾌감을 느끼게 되죠. 또한 추리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간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해요. 추리의 끝자락에 놓인 부조리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건, 단지 그 진실이 품은 속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결국 추리는 채율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었던 거죠.
추리과정이 탄탄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는 사건 해결을 위한 열쇠를 뚝 떨어뜨리는 법이 없어요. 그렇다고 고등학생 수준 이상의 추리 과정을 요구하지도 않죠. 딱 또래가 찾을 만한 단서들을 내놓고,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게 찾아내고 추리하죠. ‘코지 미스터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리얼리티의 관점에서도 분명 탄탄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모든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여고생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여과 없이 드러내는 부분이 그랬죠(“여자들은 왜 그렇게 복잡할까.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분명하게 말하면 간단할 일이잖아.” 197). ‘오빠’ 소리만 들으면 단서를 술술 내어놓는 미술관 큐레이터는 또 어떤가요. 작품 전체를 보면 작은 허점이었던 건 맞지만, 이 소설의 완성도가 높았던 탓에 더 눈에 띄었네요. 다음 작품에선 어떻게 그려지는지 한번 두고 볼 듯합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의 송시우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최근 한국 추리소설의 성향도 다채롭게 변했고 질도 날이 갈수록 향상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쉽사리 납득하진 못했지만, 『탐정단』 덕분에 납득할 수 있었어요(아, 작가의 전작이었던 『종료』를 읽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네요). 여하튼 한국 작품을 더 많이 기다리게 될 듯합니다. 작가의 후속작도 얼른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