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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체 읽는 남자
  • 안토니오 가리도
  • 13,500원 (10%750)
  • 2016-11-10
  • : 166

흔히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많은 범죄소설에서 수사의 성패는 이 흔적을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수사관들은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현장을 꼼꼼히 살펴보고, 우리는 이 과정을 이야기의 중요한 축으로 받아들이죠. 벽에 막힌 수사관은 기록으로 자주 돌아가곤 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에서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곤 합니다.

그런데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건 다름 아닌 ‘과학’입니다. 단 한 건의 살인사건만 벌어져도 이름조차 익숙하지 않은 별별 기술들이 총동원됩니다. 문제는 이런 기술들을 동원하더라도 범인을 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에요(범죄소설이 괜히 두꺼운 게 아니죠). 심지어 실제 세계에서는 미제로 남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서 가끔 궁금했습니다. ‘이런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는 어떻게 형사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지?’ 유전자 감식이 쓰이지 않았던 시절에는 수많은 사건을 미제로 남겨두어야 했다고 들었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 이야기죠. 그렇다면 그보다 더 옛날에는? 그 시절 형사사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저는 솔직히 그 시절의 수사라고 하면 이 한 마디만 떠오르더군요. 바로 ‘고문’이었습니다.

스페인 출신 공학자이자 소설가인 안토니오 가리도가 쓴 『시체 읽는 남자』는 법의학서인 『세원집록(洗寃集錄)』의 저자 송자의 삶을 다시 구성한 ‘팩션’입니다. 소설을 읽기 전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띠지에 쓰여 있는 ‘세계 최초의 법의학서의 저자’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인물을 전혀 알지 못했던 저는 검색을 통해 송자가 송나라 시절의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송나라 시대의 법의학이라니…. 솔직히 제 상식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습니다. 세계사 시간에 외우기를 송나라 ‘문치주의’의 국가였고, 이런 나라에서는 과학 같은 실용 학문은 천대받기 마련이거든요(우리 역사의 문치주의 대표주자 조선도 그랬다죠). 이런 이유로 의구심과 호기심이 각각 절반씩 제 마음을 차지했습니다.

소설은 남송의 수도인 린안(오늘날의 항저우)의 국자학에서 공부하다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와 형의 농사를 돕는 송자와 함께 시작됩니다. 형은 날마다 그를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고, 심지어 송자를 자주 때리기까지 합니다. 부모님 또한 그런 형의 위세에 눌려 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죠. 송자는 날마다 할아버지의 재단 앞에서 린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송자에게 고향은 지옥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송자는 밭을 갈다 목이 잘린 머리를 발견하고 이를 관청에 신고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수사의 양상이 제 생각과 사뭇 달랐습니다. 시체에 있는 다양한 단서를 토대로 용의자를 추려내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죠. 물론 제가 생각했던 고문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이끄는 펭판관은 상처와 주변 상황 등 다양한 단서를 이용해 범인을 지목하며, 송자 또한 유학 시절에 익힌 지식을 바탕으로 크게 공헌하게 되죠. 소설의 시작이 강력했던 건 건 수사에 대한 제 편견을 뒤집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시절에 대한 편견을 뒤집는 동시에, 흥미로운 범죄소설이라는 걸 암시하는 대목이었죠.

첫 수사에서 큰 공을 세운 송자는, 그러나 그 공헌 때문에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또한 갑작스런 사고 때문에 몸이 아픈 셋째 동생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죽음을 맞게 되었죠. 빈털터리가 된 그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쫓기듯 린안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돌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강도와 관원을 겨우겨우 피해 도착할 수 있었죠. 힘겹게 도착한 린안에서도 적지 않은 시련이 송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소설은 송자의 생존기를 쓰듯, 그 과정을 긴 분량에 걸쳐 묘사합니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이 과정에서 『시체 읽는 남자』 ‘범죄소설’이라는 정체성을 넘어서기 시작합니다. 생존을 위한 송자의 몸부림은 그 자체로 강렬한 페이소스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송자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빈민가의 현실을 정교한 묘사로 전하고 있어요. 이 대목을 읽을 땐 <레미제라블>의 빈민가를 볼 때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어요. 이렇듯 『시체 읽는 남자』는 ‘수사관’ 송자의 면모를 그리는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의 송자를 함께 보여줍니다. 『시체 읽는 남자』는 결국 한 편의 ‘생존기’이자 ‘시대극’으로 스스로를 규정하지요.

그렇다고 작가가 장르적 쾌감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 별별 위기를 다 극복한 송자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은 결국 ‘살인사건’입니다. 끝내 검시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송자는 황제의 명을 받아 살인 사건 수사에 투입되지만,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단서는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해 어렵게 어렵게 실체에 다가가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 진실이 그를 가만히 놔둘 리 없죠. 진실과 마주한 그는 다시 한번 큰 위기를 맞게 되고, 스스로의 기지 또는 주변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범죄소설 특유의 쾌감을 전해주죠.

단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마음에 걸린 부분은 만듦새였어요. 절정부에 다다르기 전, 송자의 시련은 개연성이 좀 약한 편입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송자가 내리는 결정 또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죠. 그러나 범죄의 영역에서 이러한 약점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장르물로써 기본은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셔도 좋습니다. 나아가 ‘시대극’, ‘생존기’로써도 모자람 없는 소설이었습니다. 때문에 색다른 걸 찾는 범죄소설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만 한 작품인 듯합니다. 익숙한 쾌감과 색다른 경험을 함께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의 리뷰 이벤트로 제공된 『시체 읽는 남자』를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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