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지성 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실린 작품 대부분은 종교 세계관에 바탕해 쓰였다. 그런데 하필 그 종교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서평을 비아냥으로 꽉꽉 채워두겠다고 마음먹었지만(‘요즘 그 종교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톨스토이의 신앙이 아무리 깊었어도 차마 이런 소설을 쓰지는 못했을 것’ 같은…), 표제작이자 첫 번째 수록 작품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기 전부터 그런 마음을 제쳐두었다. 작가의 솜씨인지, 소재의 강력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작품에서 구두수선공 세묜이 이름 모를 청년을 추위에서 구했던 그 선행을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온기가 차오르는 걸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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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책은 조건 없는 선행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이야기이다. 세묜을 비롯해 자신의 가게에 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제화공 아브제이치(「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가족을 믿음으로 대했던 옐리세이(「두 노인」), 형들과 달리 도깨비의 꾐에 넘어가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타락한 형들에게 바보같이 내어주었던 이반(「바보 이반」), 은수자에게 도움을 주었던 황제(「세 가지 질문」)는 자신의 것을 모두 거리낌 없이 나눠주었고 이들 모두 어떤 형태로든 구원을 받으면서 이야기들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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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를 머금고 보면 이 모든 이야기가 세상에 없는 동화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선의보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있는, 그래서 온갖 충돌이 일어나는 지금 냉소 하나를 보태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들의 구원을 다르게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들이 선행을 실천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 그 자체가 구원이었다고 말이다. 구원의 성격은 「세 가지 질문」에서 잘 나타나는데, 황제가 힘겨워하는 은수자를 돕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면, 다른 세계선에서 황제는 ‘선행을 베풀던 그 시간’에 미리 매복해있던 원수의 가족에게 복수를 당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톨스토이의 구원은 인과가 아니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으로 읽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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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다. 급격한 산업화, 열강의 충돌,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차르까지, 어쩌면 그가 살던 러시아의 혼란은 지금보다 덜하진 않았을 터. 그런 시대에 살았던 톨스토이가 이런 작품들을 발표한 것은, 인류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랐던 자신의 희망을, (신의 의지를 빌어) 세상에 전한 것 아니었을까? 1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가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톨스토이의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 희망을 과하게 투영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감상을 남기고 싶었다. 연대, 배려, 사랑을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요즘, 이 소설이 도도한 흐름을 돌려세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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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렇게 읽어서였을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끼어 있던 냉소는 「바보 이반」의 세 도깨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