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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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골라읽었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부산 첨절제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의 분투를 그린 책이었는데, 전쟁 스펙터클에서 흥분도가 가득 차오른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몇몇 디테일은 아직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생각보다 더 많이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뿐이었을까. 내 도파민은 얼른 다른 역사책을 찾으라고 부추겼고, 나는 그렇게 역사 블록버스터의 세계로 흠뻑 빠져들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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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들 이야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지?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태어난 시대와 나라가 이렇게 풍족했던 건 더 나은 내일을 꿈꿨던 ‘평범한 사람들’ 덕분일텐데, 그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대했던 것이다. 이번에 협찬 받은 『인류 멸종 실패기』를 읽는 내내 신기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런 세상에서 생존해냈다는 게 놀라웠고, 그들을 보지 못했던 내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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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너무 길어서 얼른 책 얘기를 해보면, 『인류 멸종 실패기』는 과거 유럽에 살던 평민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책이다. ‘멸종 실패기’말에서 눈치챈 분도 있겠지만, 그들의 삶은 ‘상상 이상의 열악함’ 그 자체, 아니 그 이상이었는데, 지금이라면 식품위생법, 공중보건법 위반으로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야 할 일들이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빵에 핀 곰팡이는 갓 돌 지난 유아의 주먹질 수준. 배설물을 처리할 곳이 없어서 길을 향해 뿌리면 그걸 고스란히 맞는다거나, 빵이 먹음직해 보이도록 별별 중금속을 섞어 색과 컬러를 과장했다. 마취도 소독도 없었던 당시의 수술 장면을 소개할 땐, 마치 내 팔을 자르듯 텍스트가 살아 움직였다(끔찍한 묘사만 소개해서 못 읽을 책처럼 비칠까 걱정이 되는데 오해 말아주시길. 저자는 몇몇 끔찍한 장면들을 덜 끔찍하게 중화해내는 훌륭한 필력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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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디테일을 고루 채워주는 『인류 멸종 실패기』는 특히 요즘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책이었는데(서평단 활동을 신청한 이유이기도 함), 그 이유가 중요하다. 일단 앞서 말했듯 역사엔 ‘스펙터클’ 또는 ‘(정치)드라마’뿐만 아니라, 일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상에서 난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해봤는데, 하나는 산소처럼 사방에 널린 풍요가 사실 지극히 예외적 사건이란 점이다. 난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풍요를 갈망할수록 더 깊은 갈등을 낳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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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멸종’이 떠오르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그 시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살았고, 더 나은 삶을 꿈꿨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큰 빚을 졌고, 그 빚을 후손에게 갚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전쟁에,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변화까지, 암울한 미래만 남은 듯하지만, 이전 시대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꿈을 꿔야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