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판다의 서재
  • 수학의 쓸모
  • 닉 폴슨.제임스 스콧
  • 19,800원 (10%1,100)
  • 2020-04-02
  • : 8,724

저는 옛날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컴퓨터가 아무리 머리, 아니 CPU를 돌려대더라도, 결국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을 거라구요. 가령 번역이나 예술 같은 것들이요. 아무리 많은 숫자들을 대응시킨다 해도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영역을 재현하지는 못할 것 같았어요.

그러다 4~5년 전쯤 #빅데이터인문학 을 읽었어요. 책 800만 권에서 뽑아낸 데이터로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읽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어요. 책을 읽으면서 감탄을 만 번쯤 했어요. 시대가 너무나 정확하게 보였거든요. 세계 최고의 도시 예로 들어볼게요. 사람들에게 최고의 도시를 물어보면 뉴욕, 파리, 런던 등등을 꼽을 거예요.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1911년을 기점으로 각종 문헌에서 뉴욕의 언급량이 런던을 앞지르기 시작했어요. 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거죠.

아하, 사람의 마음도 숫자로 알아낼 수 있는 거였구나. 지금까지 인문학의 영역인 줄만 알았는데,수학이 이런 일까지 해낸 걸 알고 난 이후부터 관심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런저런 수학책을 섭렵한 것도 이때부터였어요.

‘수학의 쓸모’는 같은 맥락에서 반가운 책이었어요. ‘이런 것까지 하고 있었어?’ 싶은 것들을 마음껏 보여주더라구요. 이 책은 일곱 가지 분야를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이 일들을 하기 위해 쓰인 수학적 원리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구요. 여기에 소개된 수학 원리들을 모두 요약하긴 힘들겠고(어쩔 수 없는 수포자 본능), 어렴풋한 기억이라도 남겨두기 위해 정리해보면 이렇다고 해요.

👉 조건부 확률: 넷플릭스가 내 취향을 귀신 같이 알아내는 방법

👉 패턴 인식: AI가 오이나 피자를 알아차리는 방법

👉 베이즈 규칙: 자율주행차가 혼자 운전을 하는 방법

👉 스무고개(알고리즘): 인공지능 스피커가 내 말을 알아듣는 방법’

👉 제곱근 규칙: 공수를 정하는 동전 던지기에서 계속 이기는 방법

👉 모형 설계(가설 세우기): 지레 겁먹고 피임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

이 개념들은 다른 책 읽거나 옮겨 적은 메모들 보면서 복습하기로 하고, 여기에선 인상적인 대목 몇 개만 남겨볼게요. 하나는 이 모든 성취들이 ‘정답’ 보다는 ‘확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거예요. 가령 “신용카드 거래가 속임수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속임수일 확률이 92퍼센트”라고 말하는 식이래요.(9) 지난번 읽었던 #거의모든것의역사 에서도 불확실성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있는데요. 숫자가 못 알아먹게 생겨먹은 불확실한 세계를 그대로 재현할 때 큰 일을 해낸 것 아닐까 싶었어요.

다른 하나는 ‘AI시대엔 사람이 더 똑똑해져야 한다’는 대목이었어요. 흔히 AI 때문에 사람이 설 자리가 없어질 거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뉴욕 타임스>에서 소개한 10년 피임간 실패율이 그래요. <뉴욕 타임스>는 콘돔의 피임 성공율 81%를 ‘독립시행’으로 오해한 나머지, 그걸 반복해서 곱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10년 내 콘돔 사용자가 피임에 성공할 확률을 39%라고 결론 내려요(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잘못된 가정 때문에 결론이 엉뚱해진 거죠. 가정이 잘못되면, AI도 똑같이 실수한대요. AI가 잘못된 가정에 발 딛고 서지 않으려면 사람이 똑똑해야 한대요. 그리고 스치듯 이야기하지만, 그 ‘똑똑함’은 민주화 과정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고 해요.

마지막 대목은 여성 수학자에 대한 헌정이었어요. 흔히 수학이나 과학을 다루는 책은 남자 수학자나 과학자만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에는 우리가 몰랐던 수많은 여성 수학자들이 등장해요. 패턴 인식 시스템을 발견한 헨리에타 레빗이나 역사상 최초로 컴퓨터에 언어를 인식 시킨 그레이스 호퍼, 현대적 의료 시스템을 열어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까지. 수학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어요. 이 책이 다룬 수학 원리만큼 중요한 사실들이었다고 생각해요.

결론적으로 이런 책을 학창시절에 읽었더라면, 제 수학 성적이 한 뼘만큼은 좋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수학이 이렇게 재밌고 쓸데가 많았다니. 그래서 좀 아쉽기도 하네요.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