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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대한 의혹
  • 프랑스 유언
  • 안드레이 마킨
  • 14,400원 (10%800)
  • 2016-11-05
  • : 199







 

    『프랑스 유언』은 러시아 출신 작가가 프랑스어로 쓴 소설이다. 작품 이야기에 앞서 작가의 이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혼혈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성장한 <안드레이 마킨Andreï Makine>은 1987년 프랑스로 귀화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작가로 입지를 굳혔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던 시절도 있었다. 소설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혼혈인으로서 그가 겪어온 고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의 출판사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상한 러시아 사람>이 쓴 소설 초고를 단번에 거절하는데, 이에 마킨은 가공의 번역자를 내세워 그 원고가 러시아어 번역본이라고 속여서 출판에 성공하고 호평까지 받았다는 웃지 못할 일화는 한 개인이 겪은 시련 이상의 의의를 담고 있다.

 

   어떻게 하면 프랑스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한 것이야말로 내가 그해 여름에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파악하기 어려운 이 정체성의 수많은 양상들이 서로 결합해서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가 되었다. 물론 중심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우 질서 정연한 존재 방식이었다. 내게 있어 프랑스는 이제 단순히 골동품을 넣어 두는 방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감각적이고 견고한 하나의 실체가 되었고, 그중의 한 작은 부분은 어느 날 내 가슴속에 이식되었다. (136쪽)

 

   자전적 색채가 짙은 이 소설은 프랑스 혼혈 러시아인 주인공이 프랑스어와 러시아어, 두 언어 사이에서 분열과 저항의 시기를 거치면서 자기 본질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정제된 언어로 풀어낸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외할머니 댁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진첩을 넘기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 사진들을 넘겨보는 도입부는 회상이 주를 이루는 이 소설의 성격과 분위기를 절묘하게 암시하고 있다. 실로 이 소설은 오래된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느낄 법한 아련한 정서가 이야기 전반을 휘감으면서 소설의 시간 감각을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인공이 러시아에서 보낸 유소년기부터 프랑스 이민자 신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순행적인 구조 안에서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맞물리는 개인(들)의 현재와 과거를 복기하고 추체험하는 여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무질서하게 쇄도하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출발하여 또 다른 모르는 곳으로 가는 여행>을 닮았다.

 

   그것은 하나의 추억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아니, 나는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느낌들. 어느 여름날 저녁, 공중에 매달린 발코니의 나무 난간에서 느낀 더위. 쌉쌀하고 매콤한 풀 향기. 멀리서 들려오는 우울한 기관차 기적 소리. 꽃에 둘러싸인 한 여인의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의 책장 넘어가는 소리. 그녀의 백발. 그녀의 목소리…. (333~334쪽)


    러시아적 삶과 프랑스적 정신 사이에서 혼돈을 느끼는 <나>의 성장담에는 외할머니 샤를로트의 삶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이야기 한쪽에 <나>의 성장담을, 다른 한쪽에 샤를로테의 삶을 분리해 놓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열적인 읽기 방식은 이 소설의 본질에 반하는 접근 방식일 것이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피를 반씩 이어받은 주인공에게 러시아와 프랑스가 그러한 것처럼,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의 삶 외할머니의 삶, 그 모두의 삶이 어우러져 <시간은 소문으로, 실루엣으로, 역사와 문학을 뒤섞는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소설은 두 방울의 피와 두 개의 언어라는 <서로 다른 현창舷窓을 통해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 즉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중심에 가 닿으려는 아름다운 몸짓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이 한층 더 육체적인 것이 되기를, 목이 잘리고 피가 콸콸 흘러나와 모래를 적시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가 조금 전 긴 옷자락을 활짝 벌려 놓은 채 죽은 듯 꼼짝하지 않고 있는 여자의 몸 위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가 찾는 단도는 반대쪽으로 미끄러졌다. (...) 이상하게도 그는 문득 자기가 혼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녁노을 비치는 사막에는 오직 그와 죽어가는 그 여인뿐인 것이다. 그는 분한 듯 침을 뱉더니 꼼짝하지 않고 있는 여인을 뾰족한 구두로 한번 걷어찬 뒤 스라소니처럼 민첩하게 말 위에 올라탄다. (290~291쪽)

 

   이 소설은 외할머니 샤를로트 르모니에의 삶과 맞물리는 역사적 비극을 고통스러울 만큼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또렷한 영상으로 재현해내는 한편 혼혈인으로 살아가는 애환과 설움에 대해서도 잘 그려냈다. 또한 이 소설은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분열하고 충돌하는 언어적 혼돈 속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될 바로 그 언어>, 그 누구의 언어도 아닌 자기만의 언어를 치열하게 찾아나가는 여정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격렬하면서도 잔잔한 고요함이 배어나오는 문장들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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