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평하는 자극적인 문구들에 혹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스티븐 킹은 이 소설에 대해 <지옥처럼 무섭다>고 했고 영국의 모 일간지는 <사악하고 눈을 뗄 수 없으며 독창적>이라고 평하고 있는데, 이거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다. 아마도 쉽게 연상되는 그런 지옥의 공포나 사악함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살인자가 등장하는 작품치고는 조용하고 단조롭고 무심하다.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것도 같고 숨을 억누르고 있는 것도 같은 간지러운 긴장감만이 스릴러의 명분을 떠받치고 있다.
앨리스를 옮길 때 미소 띤 그녀의 입매가 다시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피부가 수축돼 머리선 뒤로 넘어가 있었다. 그녀의 사랑니가 보였고, 그는 살가죽 뒤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지했다. 나는 네 기분을 몰라, 내 사랑. 책을 더 읽어야겠군. 내가 아는 건 일단 그녀가 지닌 본래의 수분이 빠져나가고 나면 내가 그걸 어쩌기에는 너무 늦고, 그녀는 가망이 없다는 것뿐이야. 그는 안락의자에 그녀를 부드럽게 앉히고, 자기 목에 둘러진 그녀의 팔을 풀었다. 그녀가 속삭이듯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앉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가늘고 파삭거렸으며, 눈은 눈두덩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 너는 아마 곧 카펫 위로 부서져 떨어지는 살갗과 뼈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거야. 결별에 대해 슬슬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120쪽)
런던 외곽의 오래된 6층짜리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실종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살인자가 아파트 주민이라는 암시를 주면서 시작한다. 책을 펼친 동시에 탐정 역할을 떠맡은 독자가 비밀스러운 여섯 용의자의 삶을 추적하는 순간에도 <연인>이라는 가칭으로 등장하는 살인자의 범행은 계속 이어지면서 극적 긴장감이 유지된다. 앞서 밝혔듯이 그 긴장감이라는 것이 강렬하지는 않다. 이 소설에 배경음이 깔린다면 아마도 슈베르트의 <마왕> 같은 곡이 어울릴 것 같다. 음침한 듯 경쾌한 리듬이 소설을 끌고 간다.
그들은 말없이 모두 함께 시체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를 타일 벽에 기대 뉘였다. 그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오물이 그의 코와 입에서 느리게 흘러내렸다. 좀비처럼 녹갈색 침이 흘렀다. 안경은 없어진 상태였다. 안경을 다시 찾으려면 변기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야 했지만,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를 끌어낸 이후 계속 뜨여 있는 눈은 그에게 더는 안경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 셰릴이 가스레인지 옆에 서서 멍하니 손가락을 머리에 난 혹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우린 뭘 해야 하죠?” (264쪽)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소설이 범인을 감추는 데 주력하는 작품은 아니란 걸 알아챌 것이다. 사건 공간이나 인물이 제한적이어서 범인을 추리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 소설의 방점은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 숨어든 여섯 주민의 특별한 연대에 찍을 수 있겠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세입자를 받는 이런 종류의 집>에 모여든 사람들의 처지는 책을 읽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폐 성향이 있는 남자, 악덕업주의 돈을 들고 내뺀 여자, 좀도둑질로 연명하는 가출 소녀, 정치적 망명자 등 각자의 사연을 안고 있는 인물들. 이들이 한마음으로 증오하는 집주인 로이의 우발적인 죽음으로 한순간 공모자가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을 나누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실망이야. 그런 온갖 문제를 겪고도 나는 지칠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온통 쏟아부었는데, 그들은 어쨋든 날 떠났어. 내가 그녀를 원망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먼저 끝내는 것이 늘 최선이었어. 나는 지쳤어, 너무 진저리가 난다고. 떨어진 몸 조각을 줍고, 애인을 옮기고, 그녀에게 애정을 쏟고, 희망을 품지만, 그래도 결국 여전히 혼자인 신세지. (179~180쪽)
비위가 틀리는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장면에서 작가가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적 흥분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소설 곳곳에 내장 썩는 냄새를 풍기는 주범인 살인자, 일명 <연인>의 엽기적인 행태는 공포스럽거나 사악하다는 인상보다는 안타까움과 연민을 자아낸다. 영화 <더 보이스>(The Voices, 2014)의 제리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연인>은 배신의 상처로 인한 고립 속에서 처절한 외로움에 휩싸인 인간의 비극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은 충분히 무섭다. 지옥처럼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