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니 라베의 소설 <<트랩>>(THE TRAP)은 함정의 함정에 의한 함정을 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외피라고 할 수 있을 소설적 형식으로서의 함정과 그 안에 소설적 은유로서의 함정이 각각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면서 하나의 정교한 함정을 완성해 나간다.
함정 1. 감 금 된 맹 수
명예와 부, 미모까지 겸비한 소설가 린다 콘라츠는 십일 년째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린다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있다. 십이 년 전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사건 현장을 최초로 발견한 린다는 현장에서 달아나는 범인의 얼굴을 목격했지만 끝내 범인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 그로부터 십이 년이 흐르고 세상은 당시의 충격적인 사건을 잊었지만 린다에게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형형의 악몽이다. 범인과 조우했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분노,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린다를 괴롭히는 것은 경찰과 세상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린다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안고<감금된 맹수>와도 같이 제한적이고 위태하고 무력한 삶을 이어가던 린다는 어느 날 무심히 보던 티븨 화면에서 십이 년 전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발견한다.
함정 2. 피 를 나 눈 자 매
수년 간의 외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힌 린다의 유일한 숨통이 되어준 것이 <글쓰기>였다. 어릴 적부터 상상의 위력을 확인해 온 린다에게 소설 작업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임의적이고 변화무쌍한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변화된 현실>로써 위로를 얻던 린다에게 소설은 이제 전혀 다른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여전히 생생한 악몽 속 <괴물>, 십이 년 전의 그 살인범(빅토르 렌첸)이 유명 기자라는 것을 확인한 린다는 소설가다운 함정을 마련한다. 십이 년 전의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한 소설<피를 나눈 자매>를 발표한 린다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인터뷰어로 빅토르 렌첸을 지목하고 그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치밀한 준비를 한다.
함정 3. 살 인 자 와 의 인 터 뷰
소설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인터뷰 장면은 숨죽이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기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한 얼룩이 아주 천천히 순백의 테이블보를 점령해 나가는 모양을 지켜볼 때 느낌직한 차분하고 무력한 혼돈. 은밀하게 서서히 번지는 얼룩처럼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모습을 유지하던 린다는 인터뷰 중반부터 심상치 않은 감정적 동요를 보인다. 오래 <감금된 맹수>가 뛰쳐나온 듯이 격정적으로 치닫는 린다의 심리 변화는 방심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 충분하다. 예상 가능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던 이야기의 방향이 홱 틀어졌을 때의 당혹감과 허탈한 안도감(아, 역시 그런 거였어)은 그러나 순간이다. 린다와 빅토르 렌첸의 팽팽한 대결 구도는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는 돌풍처럼 독자를 이리저리 요동치게 한다. 빅토르 렌첸은 누구인가. 린다의 생생한 기억이 가리키는 대로 잔혹한 살인마일까.아니면 동생을 살해한 린다의 거짓 기억이 만들어 낸 무고한 희생양일까.
0. 트 랩
치밀하고 영리한 소설이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 이야기, 밀도 높은 심리 묘사, 소설 곳곳에 깔린 반전의 복선들이 탄탄한 함정의 임무를 잘 해내고 있다. 끔찍한 범죄 사건으로 동생을 잃은 린다와 린다가 살인범으로 지목한 빅토르 렌첸의 긴박감 넘치는 심리전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스릴러의 탈을 쓴 사랑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살인사건을 맡은 형사와 린다의 미묘한 연애감정선은 긴 시간 트라우마라는 함정에 갇혀 있던 린다를 <진짜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문턱 역할을 한다.
영화화가 결정된 이 소설은 영화 <<캐롤>>의 시나리오 작가 <필라스 나기>가 각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