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심층심리학이 대중에게 주목 받기 시작한 게 십여 년 안팎일 것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으니 십 년이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닐 것이다. 티븨에서는 최면에 걸린 연예인이 홀린 듯이 자기의 전생을 들려주는가 하면 프로파일러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잔혹한 범죄자들의 심리를 분석해 범죄 발생의 근본 원인을 밝히면서 범죄를 재해석하고 있다. 거미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주인공 한기로가 무의식을 탐사하는 과정을 만화화한 <기로> 같은 웹툰도 인기를 얻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트라우마> <콤플렉스> <리비도> <무의식> <억압> <동기> <방어기제> 같은 심리학 용어들과 심리 치료 기법을 소개했고 많은 사람들이 오묘하고도 무한한 정신분석의 세계에 압도되었다. 독서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 연극치료 등 정신분석을 활용해 인간 무의식에 접근하고 심리적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무의식을 활용한 글쓰기 기법인 프리라이팅도 주목 받고 있다. 미지의 영역이었던 <무의식>을 환한 곳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달리 말해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는 점에서 심층심리학의 대중화 현상은 고무적이고 혁신적이지만 동시에 <무의식>에 대한 그릇된 해석을 낳기도 했다.
심리적 상처는 고통을 유발하게 마련이고, 사람은 그 고통에 관심을 집중하게 마련이다. 통속적으로 말해 마음의 상처는 손톱 밑의 가시나 눈 안의 티끌처럼 지속적으로 신경 쓰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적인 마음의 상처가 사람들을 병적인 욕망에 집착하게 만들거나, 특정한 감정을 방어하는 데 집착하게 만들 경우에는 인생 전체가 요동칠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은 정상적이라기보다 건강하지 못한 경우인데, 이런 특수한 경우에 무의식이 사람의 삶을 지배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어디까지나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지휘하고 통제하며 살아가는 의식적인 존재다. (167쪽)
인간 무의식에 대한 오해와 논란은 여태 있어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마음속 악마 이론일 것이다. 인간 마음 깊은 곳, 즉 무의식은 악마의 지배 영역이라는 주장이다. 무의식은 저 깊은 내면세계에 감춰져 있어서 개인(의식)이 통제할 수 없다는 오랜 통념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마음속에는 정말 악마가 살고 있을까.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세력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걸까. 심리학자 김태형은 지금 소개하는 책에서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무의식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아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한다.
후기의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한 초기의 올바른 견해에서 이탈하여 억압당하는 기억이나 생각을 무의식으로 간주했고, 그 핵심은 동물적인 본능이기 때문에 당연히 억압당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동물적 본능은 억압되어야 하므로 무의식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 동물적 본능은 반사회적이다.즉 무의식에는 악마가 사는데, 그 악마가 동물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주의의 무의식에 대한 견해는 옳지 않은데, 그것은 무엇보다 성욕설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이다. (35쪽)
무의식은 악마의 영역이며 의식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통설을 명쾌하게 깨고 들어가면서 저자는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 이론에서 허점과 모순을 지적하고 무의식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세운다. 저자에 따르면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은 의식>이다. 무의식은 과거의 의식,즉 개인의 심리적 역사이며 특정 자극에 의해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잠재된 의식이라는 것이다. 앞서 확인했듯이 무의식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활용한 다양한 본보기들을 주변에서 보고 들으면서도, 두렵고 이상하고 나쁜 것들이 우글거리는 지하감옥과도 같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반 대중에게 저자의 주장이 처음에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혼란감은 잠시, 책을 읽어나가면서 무의식의 정체와 영향력을 바로 보게 될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백인에 의해서 인종차별과 학대를 당해 왔기 때문에 당연히 흑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저항해야 한다. 하지만 장기간 계속된 차별화와 피학대 경험은 흑인에게 흑인을 사랑하지도, 긍정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흑인은 피학대자임에도 학대자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전형적인 피학대 심리를 갖게 된 것이다. 고정관념처럼 특정한 개념이나 사고방식 등이 굳어지면, 의식적인 회피 노력에도 무의식적 사고를 통해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22쪽)
이백 쪽이 조금 넘는 이 단출한 책은 무의식의 개념부터 작동 기제, 무의식을 내 편으로 만드는 무의식 활용법까지 싣고 있다. 두께는 얇지만 그 내용이 알차고 실하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례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통해 무의식의 핵심을 알기 쉽게 풀어준다. 개인의 심리적 역사에 해당하는 무의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든 것이며 따라서 무의식의 내용을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것. 무의식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려면 무의식의 본질부터 정확히 파악하자는 것이 책의 요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