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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나무의 작업실

1. 아침 공기가 가득한 거리. 한 남자가 거리로 나와 카메라를 세운다. 매일 아침 8시, 14년간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온 이 사람. 셔터가 눈을 깜빡이고 '순간'은 그의 눈에, 필름 위에 고스란히 담긴다.
영화 <스모크> 를 떠올리면 오기(하비 케이틀)의 조용한 주름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길모퉁이에 있는 오기의 작은 담배 가게,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단지 담배를 사기 위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연 하나쯤 있어 보이는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대며, 서로를 만나고 삶을 만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오기가 있다.


2. <스모크>가 폴 오스터의 한 단편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근거렸다. 가장 아끼는 영화인 <스모크>에 폴 오스터까지. 마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바로 그 단편이 담긴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어쩌면 이미 좋아할 마음을 준비한 채 읽은 책일지도 모르겠다.


3. (책 속에서)
10. 오기의 아파트. 밤
폴 : (계속 앨범 페이지를 넘기면, 고개를 흔들고 있다)
     사람을 압도한달까...그런 느낌이야.
오기 : (계속 미소지으며)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알 수가 없을걸세. 친구.
폴 : 무슨 소리야?
오 : 내 말은, 자네가 너무 빨리 보고 있단 얘기야. 자넨 사진들을 안 보고 있어.
폴 : 다 똑같은 사진이잖아.
오 : 다 똑같지. 하지만 한 장 한 장은 다 달라. 밝은 아침도 있고 어두운 아침도 있어.
     여름 햇빛이 다르고 가을 햇빛이 달라. 주중의 날들.
     코트를 입고 장화를 신은 사람도 있고,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있어.
     어떤 때는 같은 사람들이 보이고 어떨때는 다른 사람들이 보여.
     계속 낯선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안 보이기도 하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에서 오는 빛은 매일 다른 각도로 땅에 부딪히지.
폴 : (앨범에서 고개를 들어 오기를 본다)
     더 천천히 보라고? 응?
오 :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자네도 알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시간은 하찮은 듯한 걸음 걸이로 기어간다.
- <스모크> 시나리오 中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이 장면. 영화를 보면서도 인상 깊었던 장면인데 텍스트로 만나게 되는 경험 또한 특별했다. 어쩌면 이 책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이 대화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4. (책 속에서)
51. 브루클린 시가 상회. 낮.
밥 : 담배는 죽을 운명을 일깨워 주는 그런 것 중의 하나지.
     알아? 한 모금 빨 때마다 한 순간이 지나가고, 한 생각이 지나가.
     담배를 피우면 연기로 사라지지. 알아?
     그건 사는 건 죽는 거다라는 걸 일깨워 주는거야.
     어쩌면 모르겠어. 담배가 피우고 싶어질꺼야.
     하지만 어쨌든, 마지막이야.  자네와 함께하는 거지. 오기.
-<블루 인 더 페이스> 시나리오 중.

짐 자무시 감독이 연기했던 '밥'. 담배를 두고 나누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커피와 담배>가 떠오른다. 시나리오를 보니 폴 오스터가 밥이란 인물을 짐 자무시로 정해두고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5. 이 책은 반드시 영화와 함께 보기를 권한다. 원작이 있는 영화는 원죄를 짓는 것과도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스모크>와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서로를 돕는 영화와 소설이다.
편애(?)로 가득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즐겁게, 따뜻하게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스터 씨,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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