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는 즉, 마음의 내적 방해물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이다. 방해물들이라니? 마음의 방해물들, 그 번뇌, 혹은 망상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고통 받고 있다. 불교는 이들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에서 순전히 객관적 분석을 표방하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과는 다르다. 반야는 이 장애물들을 깨부수는 힘이다. 어떤 번뇌나 망상도 이 앞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이 반야는 워낙 견고하여, 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 p23
혜능은 깨달은 자의 징표 가운데 하나가 “밖으로 사람들의 실수와 악행을 덜 기억하고 곱씹는 것外不堅靭之過惡”이라고 적어두었다. : p54
여시(如是)에 대한 옛사람들의 해석은 다기다양하다. 지금 야부 노인은 여(如)를 유무(有無)가 불이(不二)라는 뜻으로 새기고, 또 시(是)는 그 여(如)에 시비(是非)가 없다는 뜻으로 읽었다. : p65
『별기』에서, 구분과 차별이 인간의 관심과 욕망의 투사라는 말은 자주 했던 것 같다. : p70
이때, 단단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가슴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자만심과 허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내가 너를 가르치고 도와준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공덕을 까먹고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어디 보살뿐이겠는가. 일반적으로, 사람 사이의 대화나 거래에서, 혹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나, 혹은 자아의 심리적 방해가 엷을수록 더 만족스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p135
나는 나 밖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존재한다. : p139
불교는 불을 꺼나가는 과정이다. 열반nirvana이라는 말의 어원이 촛불을 끄듯이, “(탐욕과 증오, 기만의) 불길을 끈다”는 것임을 유의하자. “자신 속의 불건전한 정념과 무지를 제거하고 조복(調伏)시켜라.” 이 ‘마음의 훈련’은 중대한 결과를 몰고 온다. 자기 의식, 혹은 에고의 중심이 약화되고 흔들린다. 우리가 ‘나’라고 불리는 것들은 실체라기보다, 이들 감각과 정념, 관심과 인식, 기억과 편견을 토대로 ‘부풀려지고’, ‘증폭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래서 자아의 관념이 실체 없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이 저간의 소식을 한마디로 공(空), 즉 ‘비어 있다’고 말한다. (공sunyata이란 말의 어원은 공갈빵처럼 ‘부풀려진’에서 왔다. 그 빵의 속은 ‘실제’ ‘비어 있다’.)
요약하면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자아의 투사project에 불과하고, 그 자아는 감각과 충동에 연동되어 있으며, 이들은 자기 밖의 영향력과 그 흔적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자아’는 없고, 자아가 없다면 ‘세계’ms 실재하기를 그친다. : p149
혜능은 멸도(滅度), 즉 위대한 평정과 자유란 “번뇌(煩惱)와 습기(習氣), 그리고 일체(一切)의 제(諸)업(業)장(障)이 멸진(滅盡)하여 다시 찌꺼기가 없는 경지”라고 썼다. : p160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하나이고, 그전에 생사니 열반이니가 아예 성립이 우스꽝스럽다. 그것을 평등(平等)이라고 했다. 평등은 불교의 전문 용어로 사물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 p164
"색성향미촉법의 토대가 없는 보시“도 같은 뜻을 표명하고 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촉각, 그리고 의식은 한 인격이 토대를 구성하는 자료들이다. 이들 여섯 대상이 자극을 주면, 신체는 이 자극을 향해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되면서 견해(見解)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된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이다. 다시, 성격은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한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다. : p180
처음 1)우리의 욕망과 그 ‘대상’물이었던 변(匾)계(計)소(所)집(執)의 세계는, 2)사물이 서로 서로 관계하고 있는 의타(依他)기(起)의 세계로 이동한다. 이것은 ‘시선의 혁명적 전향’이다. 그것은 욕망과 그 충족의 전망에서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유희와 소요의 시선이다. 그로써 돼지의 눈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만나는’ 자기 혁명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놀라워라, 거기 남을 비난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여기가 종교적 전회이자 치유의 시작이다. 그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의 우상을, 토대를, 즉 상(相)을 깨뜨림으로써 얻은 것들이다. : p182
문제는 21세기, 앞으로입니다. 권위와 저항의 대립 시대는 지났으니, 앞으로의 화두는 개인의 삶과 일상의 관계일 것입니다. 거대담론과 정치의 시대는 퇴조하고, 문화와 놀이가 봇물로 소통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하여, 21세기는 유교와 불교의 시대입니다! 기독교 또한 이념과 당위의 도그마를 권위적으로 설파하는 역사신학보다, 개인의 영성과 각성에 주력하는 영성신학이 설득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 p196
시비(是非), 선악(善惡), 미추(美醜)에서, 생사(生死), 그리하여 최종적 범주인 유무(有無)를 넘어서는 곳에 객관적 사태로서 법(法)이 있다. 그 자리를 대승 중관(中觀)은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그래서 중도는 불가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사(四)구(句)백(百)비(非)라 어떤 ‘판단’도 중도 근처에 갈 수 없다. : p244
상(上)승(乘)법(法)이란 혜능의 돈교를 가리킨다. 여기 닦아야 할 것도 없고, 그만둘 것도 없다. 이루어야 할 해탈도 없으며, 가야 할 서방 극락도 없다. 야부의 노래를 빌리면,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 無欠無餘)라, 세상은 ‘이미’ 완전하다. 그 안에서 나는 “하루 종일 바쁜데, 무슨 일이든 마음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 완벽한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혜능은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무착(無着), 즉 내 마음이 타자에 의해 점령되지 않는 것이고, 둘은 무상(無相), 즉 세상이 나로 인해 구획되거나 시비되지 않는 것이다. : p258
수상행식(受想行識)... 이 말을은 영어로는 각각 감정feeling, 지각perception, 의지volition, 의식consciousness을 가리킨다. 이들 ‘마음’의 여러 상태, 혹은 국면들은 ‘몸’을 나타내는 색(色, body)와 함께 오온(五蘊)의 멤버들이다. : p261
요컨대 불교가 늘 경계해 마지않는 생멸심이란, 자아에 토대(住)를 두고 추동된(生) 상념과 정념(念)의 출몰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기적이면서 인위적이기에, 부자연스러우며, 결국 타자와 교감 없이 냉담하다... 그 이기적 자아의 닫힌 매트릭스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生滅) 마음이 왈, ‘생멸심(生滅心)’이다. 이 마음은 뚜렷하고 분명하기도 하지만, 주로는 머릿속을 분주히, 먼지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상념으로 나타난다. : p264
공(空)이란,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유(有)와 무(無) 사이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내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렇다”와 “아니다”의 부저를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분별(分別, vikalpa)의 뿌리 깊은 습성, 즉 이(二)변(邊)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공(空)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오랜 습관을 넘어서는 작업이지만, 또 한편 불(不)공(空)이라,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자심여래(自心如來)는 자오자각(自悟自覺)이라, 번뇌와 망념을 여읜 이 마음에서, 복락이 스스로를 무한히 펼쳐간다.” : p266
사람들은 대개 이들 꼭두각시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자아(自我) 혹은 페르소나persona에 익숙하다 보면, 문득 “나는 어디 있지” 하고 돌아보는 때가 온다. 자기 아닌 것에 자신을 맡겨버린 이 일상화된 비극을 현대철학과 종교는 ‘소외alienation'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럼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 불교는 이 물음을 끌어안고 해결을 모색하는 개인화individuation의 순례요 등정이라고 할 수 있다. : p276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철학 meditations』, 강분석 역, 사람과 책, 2001, 39쪽) : p284
공자가 말했다. “말을 해야 할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잃을 것이고, 말하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그 말을 하면, 그 말을 잃을 것이다. 지자(知者)는 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다. : p303
너를 모욕하는 것은 너에게 욕을 퍼붓는 사람이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모욕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람들에 관한 너의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를 화나게 할 때, 너의 머릿속의 ‘생각’이 화나게 하는 것임을 알라. (『엥케이리디온-도덕에 관한 작은 책』, 김재홍 옮김, 까치, 2003, 36쪽) : p313
“불국토는 청정하여 이미지도 형태도 없다.” 삶은 이미 주어졌다. 우리의 삶은 다만, 그 안에서 경영될 수밖에 없다. 푸념하지 말지니, 지혜는 그 ‘위대한 수용’에서 시작한다고 한 바 있다. 그때 문득 세상이 평등하고 화평해지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 p385
혜능은 이 우주적 참여로서의 장엄을 세 가지로 특화했다.
1) 하나는 ‘세간불토의 장엄’이다. 세간불토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공간을 뜻한다. 거기 공양한다는 것은 불교라는 종교에 의식적 의례적(儀禮的)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경전을 베끼고 외며, 절에 보시하고 스님들께 공양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2) 둘째는 ‘몸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다. 이 몸을 경건히 잘 건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혜능은 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절간을 번듯이 하는 불사’보다 위대하다고 가르친다.
3) 배려로서의 장엄보다 더 근본적이고 위대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사(佛事)’이다. ‘마음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란 내 마음을 언제나 밝고 환하게, 구름 끼지 않게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내 마음 하나가 깨끗해지면, 곧 온 세상이 밝아진다. 사람이 남에게 하는 생각과 태도, 말은 곧 스스로의 관심과 수준의 반영이다. 내가 도둑이면 모든 사람이 도둑처럼 보여 경계를 놓지 않게 되고, 자신이 부처이면, 모든 사람을 부처처럼 존중하게 된다. 무소득심(無所得心), 세상에 내가 얻을 것도, 가질 것도 뭐, 별 대수냐 싶은 마음, 그 여유로운 한 마음을 가지면, 세상이 그 가닥을 통해 숨통을 열고, 사태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 : p385
그의 마음에는 17세에 들었던 어는 현자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그는 어느새 바른 길에 들어서 있을 것이다.” 그는 나이 50이 되도록 매일 매일을 거울 앞에서 물었다고 한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지금 하려는 일을 하고 싶어할 것인가.” 아니요라는 대답이 자주 나온다면 그것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p411
삶은 시한부입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사느라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맙시다. 도그마에 붙잡히지 마십시오. 도그마란 다른 사람이 생각해놓은 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이 내는 소음에 당신 내면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당신의 마음과 직관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의 가슴은 당신이 진정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 p412
불교는 가정적 환경이나 사회적 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가 오랜 고통과 불행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하여 불교의 ‘지혜’가 실제 작용해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이다. 혜능 또한 반야바라밀의 타겟이 ‘우심생멸(愚心生滅)의 제거’라고 분명히 적었다.
‘우심생멸’은 ‘어리석은 마음에 오가는 생멸’이다. 아니 ‘어리석은 심생멸(心生滅)’로 읽을 수도 있다. 짐짓 『대승기신론』의 어법을 차용해서 이 구절을 읽어보기로 하자. : p432
불교는 우리 삶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거나, 즐거움만이 가득 차 있다고 사기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을 구성하는 연쇄고리를 보다 분명히 알고, 그 뿌리가 인간의 원초적 무지와 맹목적 욕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때, 그와 더불어 비로소 사물의 실상이 선명히 잡힐 때, 그 자각이, 그 반야바라밀이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고, 존재에 위안을 주며, 궁극적 평안의 언덕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가르친다. : p434
혜능이 말하는 ‘어리석은 마음의 생멸(生滅)’이란 요컨대 부자각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활동들을 가리킨다. 이들 ‘소외된 심생멸’은 작은 일에 쉽게 자극받고, 심리적 정서적 자아의식이 강하다. 자기만의 독단을 객관적이라 자부하며 과거의 기억에 현재를 묶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장밋빛 환상을 걸기 쉽다. : p435
사람에 따라 가치의 무게중심이 다르기에 관용이 필요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큰 규모에서 생각하고, 보다 원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을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 p442
혜능은 그 요점을 잘 모를 사람들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하나는 “5근(根) 중에 6바라밀을 닦으라”이고, 하나는 의근(意根) 중에 무상무위(無上無爲)를 닦으라“이다. 6바라밀은 감각을 길들이는 훈련이고, 무념무위의 수련은 상념-의지를 길들이는 훈련인데, 이 둘은 수레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협력 동시(同時)해야 한다. : p451
무상이란... 나의 욕망과 에고의 이해관계를 통해 사물을 가르고 편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무위란 나의 욕망과 이해 관계에 입각해 사태를 편의적으로 이기적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훈련을 의미한다. : p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