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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서재
  • 녹턴
  • 가즈오 이시구로
  • 12,600원 (10%700)
  • 2021-04-20
  • : 1,322

삶이 무료한가. 그래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가. 하지만 가벼운 장르소설은 싫은가. 그렇다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기 바란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한결같이 재미있고 묵직하고 감동적이다. 초기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부터 최신작 『클라라와 태양』(2021)까지 그의 소설은 삶과 시간과 기억 너머에 있는 인간성의 희망을 추적한다. 대부분 1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배치해 역사와 추리,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룬다. 인간 문명의 이기와 한계를 고발하는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 또한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녹턴』은 2009년에 출간된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부제가 눈에 띈다. 총 다섯 개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는데 부제가 암시하듯 단편 곳곳에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인물이 정면에 배치된다. 이시구로는 음악을 문학적 소재로 차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로 평가받는다. 『녹턴』에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다양한 삶의 양태가 녹아 있다. 음악적 예술혼 위에서 사랑과 기억과 시간을 관통하는 애잔한 단편들이 독자의 가슴을 적신다.

첫 번째 소설 「크루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광장에서 밴드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얀(야네크)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가 광장에서 연주하던 중 한물간 가수 토니 가드너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얀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토니의 광팬이었다. 얀은 토니에게ㅡ어머니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ㅡ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을 건다. 근데 토니는 아내 린디와 헤어지기 위한 이별 여행 중이다. 토니는 린디의 인생 여정을 얀에게 자세히 들려주고 린디의 호텔 창문 밖 곤돌라 위에서 그녀를 위한 세레나데를 준비한다. 토니가 노래를 부르고 얀은 기타 반주로 합류한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얀은 토니와 아내의 이별 소식을 전해 듣고 그날 밤(베네치아에서의 만남)을 회상한다.

두 번째 소설 「비가 오나 해가 뜨나」는 레이 찰스의 곡 'come rain or come shine'에서 따온 제목이다. 레이먼드는 자신의 절친 찰리의 요청으로 런던에 있는 찰리 집으로 향한다. 레이먼드가 친구 집에서 겪는 예기치 않은 에피소드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찰리는 아내 에밀리와의 부부 생활에 위기가 닥쳤다. 에밀리는 레이먼드의 대학 동기여서 서로 아는 사이다. 아내와의 위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친구 레이먼드밖에 없다고 여긴 찰리는 레이먼드에게 도움을 청하고 해외로 출장을 떠난다. 찰리의 요청을 수락하긴 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레이먼드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발생한다. 그런데 레이먼드와 에밀리가 옛 시절에 음악을 매개로 공유했던 기억 너머의 공감대로 인해 이야기는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열린 결말을 통해 독자는 사랑과 우정과 시간을 관통하는 음악의 힘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된다.

표제작 「녹턴」은 첫 단편 「크루너」와 연결된다. 토니 가드너의 아내 린디가 「녹턴」에도 등장한다. 린디는 「크루너」에서 화자 얀과 남편 토니로부터 언급되고 수식되는 수동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녹턴」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린디는 재능은 있지만 추한 외모 때문에 저평가를 받는 색소폰 연주자 스티브와 함께 위험하고 대담한 일을 벌인다. 스티브와 린디 모두 전과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의사 보리스로부터 성형수술을 받는다. 같은 병원에서 같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서로 옆방에 놓이게 된 두 사람은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만나 서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블랙코미디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삶과 사랑과 자존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무명의 젊은 뮤지션 '나'가 시골 카페를 운영하는 누이 부부의 집에 머물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말번 힐스」는 수록작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화자는 누나의 카페에 종종 들리는 스위스인 부부 틸로와 소냐와 가까워진다. 그들은 관광차 영국에 방문했는데 음악과 예술에 대한 명확한 철학을 가진 프로 뮤지션이다. 그러나 두 부부 사이에 벽이 존재하고 갈등이 있음을 화자는 알아차린다. 소설의 말미에 남편 틸로가 산책하는 동안 화자와 소냐가 대화하는 장면은 삶과 성공의 방정식에 지친 수많은 독자에게 위로를 안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마지막 단편 「첼리스트」다.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청년 티보르는 우연히 미국의 중년 여인 엘로이즈를 만나 첼로 개인 교습을 받는다. 티보르는 교습을 받을 때마다 엘로이즈에게 빨려 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데 엘로이즈는 말로만 코칭할 뿐 자신이 직접 첼로를 켜진 않는다. 티보르의 의심이 쌓이는 만큼 소설의 긴장은 고조되며 무언가의 비밀이 밝혀진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절정으로 치닫는 서사의 전개 과정이 몰입감 있게 펼쳐진다.

다섯 편의 소설 모두 음악을 소재로 하여 인간이 처한 현실과 이상의 문제를 관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낭만을 꿈꾼다. 그러나 낭만으로만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실력과 경쟁이라는 냉엄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진짜 사랑과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건 쉽지 않다. "'참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옳은 명제임에도 일부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나'가 '나 외의 것'과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인식 하에서만 인간 문명의 발전은 가능하(했)다. 나를 발견하는 것. '참 나'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타자와 어떻게 분리되는지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사랑하고 진실한 행복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녹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꿈과 사랑을 채우지 못한 결핍의 존재들이다. 부재와 결핍은 인간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흥미로운 건 인물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 모두 음악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노래하고 어떤 이는 연주하며 어떤 이는 교습한다. 음악은 인간에게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게 하는 윤활유가 되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침잠 속에서 외부를 잠시 잊게 하는 힐링과 위안을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은 모든 공간을 채우고 전 시간을 장악한다. 소설 『녹턴』의 주인공은 음악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위원회는 이시구로에 대해 “위대한 ‘감정적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우리의 환상적 감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발견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또 “그는 과거를 이해하는데 큰 관심을 보여왔고, 개인이자 사회로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탐구하고 있다”며 “제인 오스틴과 프란츠 카프카를 섞어놓은 듯하다. 여기에 마르셀 프로스트의 성향도 약간 가미돼 있다”고 극찬했다. 카프카와 프로스트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한림원의 평이 낯설긴 하지만 이시구로의 소설 속에 오스틴의 로맨스와 유머감각, 카프카의 꿈과 기억, 프로스트의 시간과 의식의 흐름이 여러 층위에 긴밀하게 뒤섞여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서평의 서두로 돌아가자.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지루하고 난해하고 만연한 소설은 질색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훈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의 존재 목적은 '인간성의 탐구'이다. 즉 '좋은 소설'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인간성을 옹호하고 성찰하는 소설이다. 이 명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녹턴』을 아낌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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