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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서재
  • 번역가의 길
  • 김욱동
  • 15,300원 (10%850)
  • 2023-02-15
  • : 191

독자의 입장에서 번역된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역자가 얼마나 거대한 엉덩이의 힘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서평 한 편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려울진대 방대한 원문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며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감히 어림잡기 힘들다. 존경스럽기도 하다. 글쓰기는 고통이다. 글은 써본 사람만이 안다. 시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텍스트를 직접 써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의 영역이란 게 있다. 그것을 알기에 역자의 수고는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워 보인다.

고전을 즐겨읽는 나에게 세계문학 번역가들은 모두 지적이고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채권자다. 특히 원문을 잘 이해하여 탁월한 한국어 역량으로 군더더기 없이 번역한 명망 있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찬란하다. 가령 고 박형규 명예교수(고려대 노어노문학과)와 김화영 명예교수(고려대 불문학과)는 톨스토이와 카뮈의 작품세계를 안정적으로 탐독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난해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해 완역본을 낸 김희영 명예교수(한국외대)의 집념도 대단하다. 우리 같은 일반 독자는 이들의 수고와 헌신에 기대어 문학을 향유하고 있음을 부인해선 안 된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등 오랫동안 영미문학을 번역해온 김욱동 명예교수(서강대)가 번역을 주제로 책을 출간했다. 『번역가의 길』은 작가이자 학자이며 번역가인 김욱동 교수가 번역에 관한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밝힌 책이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번역에 관한 여러 주제를 훑는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번역의 의미와 성격을 가장 먼저 배치했고 여러 오역 사례를 실었다. 속담에서 드러난 성차별을 꼬집고 성경 번역의 긴요성을 논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명대사를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국내에서 어떻게 번역해왔는지 추적한다.

저자가 소개한 고전문학의 오역 사례는 일반 독자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라 흥미를 끈다. 저자는 우리가 서점에서 쉽게 선택하는 피츠제럴드, 포크너, 헤밍웨이 번역본의 오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저자가 진단하는 오역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그중 번역자가 원천어에 대한 문해력이 부족하거나 소설의 시대적·문화적·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대표적이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가독성은 좋지만 정확성은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 한국 모 소설가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은 오역을 넘어 졸역 수준임을 여러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잘 읽히는 유려한 번역은 정확성을 전제할 때만이 의미가 있음을 저자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사실 잘 읽히는 번역과 정확한 번역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독자들 사이에서도 뜨겁게 토론하는 주제다. 오래전 카뮈 번역의 올바름을 놓고 신생 출판사 대표가 국내 최고 카뮈 전문가에게 도전장을 던진 일이 있었다. 당시 많은 논란과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기존 권위를 전복하지 못한 채 싱겁게 끝이 났다. 그 사건은 번역에서 독창성보다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원리를 독자에게 일깨웠다. 원문이 난해하면 난해한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즉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게 가장 정확한 번역인 것이다. 16세기 번역 이론가 에티엔 돌레가 번역가로서 염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결조건으로 '원천어와 목표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꼽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장 「성경 번역에 대하여」 또한 흥미롭게 읽힌다. 사실 성경의 문체는 지나치게 예스럽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은 '개역개정'이다. '개역개정' 번역 당시 보수적인 역자들이 문체를 조선어식으로 고집한 탓에 사어가 많고 의미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에 개인적으로 '개역개정'을 기본으로 하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주석을 보거나 '새번역'이나 '쉬운성경'을 참고하곤 한다. 한편 '새번역'의 경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서 번역했고 쉬운 말로 되어 있어 의미 파악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시편》을 전부 산문으로 번역해 가독성과 시적 느낌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말씀의 음미성 차원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다. 신학적인 부분과 맞물려 있어 평신도가 뭐라 논설하긴 적절치 않지만 시대와 상황을 고려할 때 '개역개정'만 고집하는 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개신교단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합의된 성경 번역에 대한 갈망은 지나친 욕심이자 환상일까.

서평을 정리하자. 작년 말 한강의 노벨문학상 쾌거에 온 국민은 열광했다. 평소 책을 거의 읽지 않던 사람도 서점에 나가 소설을 손에 쥐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노벨상 효과일 것이다. 한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환호 속에서 놓치기 쉬운 헌신이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의 성취 과정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수고가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성실하고 적확한 번역이 없었다면 한국 작가가 쓴 한국어 소설의 노벨상 수상은 요원했을 것이다. 번역은 그만큼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작가의 글이 아닌 번역가의 글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번역의 현실과 중요성을 진솔한 에세이로 풀어낸 김욱동의 『번역가의 길』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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