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나호명의 북카페


   


 두 작가의 글을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글과 문장으로 질감이 다른 것들을 대비하면 새로운 것들이 느껴지고 보이기 시작한다. 화가는 물감으로 풍경을 그렸지만 작가는 문자와 문장으로 풍경을 그린다.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 ‘서풍부에서', 김춘수

허리가 굽은 늙은 여자들이나 아이를 업은 젊은 여자들이 

읍내 버스 차부 옆 공터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나물을 팔았다. 

그 여자들의 먼지 낀 좌판은 영세했다. 

농협의 비료포대나 보온 못자리를 걷어낸 폐비닐 자락 위에 말린 마물과 호박오가리, 

검정콩 및 움큼을 펼쳐놓았다. 그 여자들의 좌판은 삶을 영위하는 상행위라기보다는 

밤에 우는 새들의 울음처럼 그 종족의 핏줄 속에 각인된 무늬처럼 보였다. 

외출나온 군인들의 팔짱을 낀 여자들이 가끔씩 좌판을 기웃거렸다.

 - '내 젊은 날의 숲', 109쪽

어두운 산맥을 건너오는 바람이 시간을 몰아가는 소리를 냈다.

바람소리에는 먼 숲을 훑어온 소리와 가까운 솦을 스치는 소리가 포개져 있었다.

바람의 끝자락이 멀리 지나온 시간의 숲까지 흔들었다.

스피커 구멍으로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 바람소리 속에서 앵앵거렸다.

스피커 구멍으로 어머니의 몸이 흘러나와서 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것 같은 환영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 '내 젊은 날의 숲', 99쪽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