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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알쟁이
  • 소란
  • 박연준
  • 14,400원 (10%800)
  • 2025-11-11
  • : 1,013

소란

박연준 지음

 

언젠가는 다 읽는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나 나름의 정리를 하기까지 또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새에는 읽고, 정리하고 어딘가로 보내지는 책이 된다.

 

출판하면서 인쇄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보니 또 달리 보인다. 책 크기, 표지 구성, 내지 글씨의 크기 모든 게 어설프다. 박연준을 담기에 어설퍼서, 글이 더 적나라하게 보인다.(제가 읽은 책은 이번 판이 아닙니다)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다.

 

결국 가는 봄의 등 뒤에 대고 지껄이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다. 태양과 늙은 봄과 호리병 속에 잠긴 몇 송이 꽃이 서쪽에 기대 공들여 기우는 곳. 토지문화관에서 내 방은 서쪽이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첫 느낌은 어둑하다는 것이었다. 창이 난 쪽이 나무가 우거진 쪽인데다 서향이었으므로, 빛이 가난한 방이었다.

 

더 이상 성숙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아직은 노화로 나빠지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간신히 폭이 좁은 터널 하나를 지나온 얼굴로 서 있는 나이가 서른이다.

 

이미 흘러가버린 날들은 어디에 머무는 걸까?-흘러간 날들도 머무는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다니...시인이란.... 생각과 언어와 세상이 기상하다.

 

겨울은 춥고, 높고, 길다.

 

나도 모르게 흘려버린, 완전히 사라진 것들이 그리울 때면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편지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출렁이는 겨울 바다 한 장을 북, 찢겠다.

 

겨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혹독한 계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추위가 지나가길 묵묵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렇게 일렁이는 종이는 처음이다. 바다 위에 글을 쓰려면 손가락들의 멀미를 각오해야 한다. 조금 천천히 써야 할 것이다.

 

모순은 반복을 낳는다-양귀자의 모순 한줄평으로 딱이군.

 

끝내 시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야 말겠다. -나는 무엇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있는가. 왜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원하는가.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 집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적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 잘도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양지에 발을 들이는 일이 내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바르고 멀쩡하게 생긴 것. 온화하고 근사한 것, 떳떳하고 따뜻한 것, 힘들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할 말이 많으면서도 할 말이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내 아버지는 제대로 패배한 사람이었지. 순하게 늙고, 완전하게 패배하고 싶어했고, 결국은 성공했으니까. 대학 때는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저 패배주의를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패배주의를 증오한다고 치를 떨었지. 요새는 이런 생각이 들어. 도대체 제대로 패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애둘러 가자. 급하지 않게 돌아서 가자.

 

일요일이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떤 슬픈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납작하게 숨는 일은 아무래도 12월에 하기 좋은 일

 

발랄하고 은은한 음들이 오선지 위를 걸어 다니게 둔다.

 

나는 나를 어디에서 빨면 좋을까요? 내가 잘 빨리기는 할까요? 잘 빨아 넌 나는 무슨 색깔일까요?

 

안녕하신가요. 라는 쉬운 인사말 앞에서 조금 서성였어.

 

내 지붕 아래로 가끔 칠이 벗겨진 기차가 지나다니고, 세숫대야에 쏙 들어가는 작은 바다도 넘실대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조용히 늙어가기도 해. 물론 옛날 음악이 흐르는 주크박스와 한 소쿠리 귤, 숨겨둔 꿀단지도 있어. 난 요새 부자야. 이렇게 살고 있다고.

 

입을 한껏 오므리고 ‘보오오오옴’할 때, 두개골 안에 갇힌 비음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요동치는 게 느껴져.

 

그들이 주인공이야.

 

뒤늦게 머리를 들이미는 늦된 감정이 있습니다.

가장 늦게 오는 것들

초췌해진 표정으로 머쓱하게 서서는 애먹이는 것들

끝내 마음을 당혹시키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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