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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알쟁이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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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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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한글자 한글자 놓치면 끝나는 것 같은 책이 있다. 천천히 의미를 이해하며 읽으면 많이 남는 책이 있다. 신형철은 그런 글을 쓴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영화에서도 터무니를 찾아내어 전달한다.

 

survive와 live에 대한 생각의 연속이었다.

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

나는 숨을 쉬고 있고, 살아있지만, 내가 살아있냐고 물었을 때 너는 없었다.

 

책을 읽고 나면 밑줄 그은 문장들을 조합하는 일을 하는데, 너무 많기도 하고, 문장 그대로 살아 있어도 될 것 같아 조합을 하다가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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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위안.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낸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 먹는다. -지금 그렇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수락한 것은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한번 알게 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저항하는 일이 요즘의 내게는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젋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 바로 그 믿음에 갇힌다.

 

자기가 편협함인지를 모르는 편협함에 대한 구역질

 

울어버려. 울어버려야 해. 안 그러면 너는 죽고 말아.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픔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왜 새벽에 위로가 되는 것들은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는 네 감정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낯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유창하게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말이란 그렇게 착착 준비되어 있다가 척척 잽싸게 나오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한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 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들이 그의 체험적 결론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안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고통 가까이에 있어 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감히 그런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없어 못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을 선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제 지위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할 것이다.

 

비판과 풍자와 조롱.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대다수의 당사자들에게 부끄러움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선택받은 소수인 자신들에게 따르는 당연한 보상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희망은 종신형

 

찬란한 햇빛, 아까워

마음껏 절망이라도 해야 살겠다.

 

사건의 충격, 진실의 무게, 응답의 울림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이들을 감옥에 처넣는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나라는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또 진행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가 나라는 서사의 주인공인 동시에 작가라고 믿는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서사의 흐름에 균열이 오거나 반전이 생기면 다시 쓰기를 해서 그 사건을 내 삶 안으로 통합해낸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이별을 겪고 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옛 노래 제목을 떠오리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이 그것입니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 그 무렵이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원래 답이 없다.

 

지금도 촛대처럼 불타고 있다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결과에 대한 예측이 과정에 영향을 끼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고 부른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우리에겐 희밍이 없지 않다. we are not without hope. have 동사가 아니라 be 동사다.

 

어떤 시인의 사회적 발언을 지지하는 것과 어떤 시인이 특정한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후자는 어떤 문화적 폭력의 은밀한 시작일 뿐이다.

 

토니 다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이 깊은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토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글을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시를 읽고 나서 나는 이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인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해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중의 착각일지라도, 이런 착각은 어떤 에너지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고, 정확하게 죽고 싶다는 것. 세상의 어떤 이는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세상의 어떤 이는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 그런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 먼 훗날 우리를 정확히 죽게 할 것이다.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 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고, 그 결여 때문에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어.

 

타인을 부정해야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삶은 비극적이다.

 

봄날의 새끼 곰과 정말이지 굉장한 것

 

손편지라는 것은 왜 별 내용이 없어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편지는 문어체의 공간입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다섯 줄짜리 편지라 해도 일단 편지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이의 말투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양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문어체의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싶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할까요.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물론 최약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일 것이다.

 

독서로 여행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지만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불만은 없다. 내게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보다는 읽지 못한 책에 대한 갈급이 언제나 더 세다. 그러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믿는 척하면서 안 믿고, 지는 척하면서 이기는 것.

 

대중친화적인 소설이나 영화라고 칭송되는, 그러니까 쉽고 재밌기만 한 작품을 보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작품들이 나를 포함한 대중을 아무 생각 없이 재미만을 탐닉하는 소비자 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나는 거기서 지갑을 열어. 그리고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즐겨. 넌 원래 그렇잖아 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전달하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전달하기 위해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과 형식을 동원하는 작품들은 대중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상업적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그런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 그것을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옹호하는 평론가들이야말로 실은 대중을 존중하는 이들이 아닌가.

 

다시 한번 우리를 믿어줘서 고맙다.

 

잘해보려고 미루다 결국 못 하게 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을 (못) 만나는 일도 그중 하나다. 만나기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이 있을까. 그냥 내일 아니면 모래 만나야 한다.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하리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

 

그 무엇도 이 일을 대체하지 못한다. 소설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해맑은 슬픔

 

제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삶은 베어지지 않는다.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서 둘 다 포기해버렸다.

 

말하지 않고, 쓰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최대한의 것을 이뤄내는 이들이다.

왜 이렇게 긴 글을 썼냐는 물음에, 짧게 쓸 시간이 없었노라고 대답한 지혜로운 작가가 누구였더라.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것.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마음산책 2013

 

이것은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일생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은 제한돼 있고 나는 이미 40년을 살아버렸다. 이제는 그럭저럭 읽을 만한 소설까지 읽을 여유가 없다. 이런 조바심 때문에 근래의 내 독서는 점점 강팍해지고 있다.

 

쓸쓸한 농담 같은 소설이다.

 

생명연습. 불완전한 생명인 인간이 완성 없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이야 말고.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

 

윌리스는 자신이 윌리스라는 사실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했는데

 

저러다 문득 돌아보면 그 허무를 어찌하려나 함께 걱정했다.

 

도대체 짐승도 아니고 천사도 못 되는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는 뜻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스토너가 죽어 이야기가 멈출 때까지 이 소설을 따라 읽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무의미에 이르는 병

의미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색하게 묻게 된 것은

어떤 질문은 그것을 간절하게 묻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조금은 달라지게 한다. 정말 나는 그렇게 되었다.

 

이번 약은 잘 들을 겁니다.

의사 말을 듣고

믿고 싶은 그 말을 믿고 나는 묻는다.

 

얼마나 잘 듣지 않았나

이불 속에 드러누운 나의 마음은

컴컴한 창밖 얼어붙은 얼굴을 들이미는 나의 고함조차

듣지 않았지 열어주지 않았지

 

내가 있어도 나는 빈 방

없어도 나는 나의 빈 방

 

앞으로도 나는 듣지 않을

빈 방의 나의 소리들

이 약은 잘 듣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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