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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속의 순간들
  • 제프 다이어
  • 18,000원 (10%1,000)
  • 2013-01-28
  • : 612

대학 초년생 때부터 군대에 가기 전까지, 나는 사진에 꽂혀 있었다. 미대에 개설된 사진학 수업을 들었고 도서관에서 사진 책을 뒤적이기도 하며 그 세계로 빠져들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사용해본 SLR 수동카메라는, 아빠가 1970년대에 취미 삼아 찍으려고 중고로 구입했다는 펜탁스 기종이었다. 애초에 노출계가 고장 나 있어 책을 보며 대강의 감으로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이리저리 맞춰가며 연습해야 했다. 나름 열심히 고민하며 찍은 뒤에는 교내 필름 현상소로 달려가 한참을 기다린 끝에 인화된 사진들을 펼쳐놓곤 현상소 아저씨와 초점과 감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때는 사진이란 세계가 참 재밌었다. 네거티브 필름뿐 아니라 슬라이드나 흑백 필름으로도 많이 찍었고, 어느 시점부턴 배우는 자세보단 즐기자는 생각으로 주변 것들, 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렌즈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기술적으로 훌륭한 사진은 한 번도 찍어보지 못한 것 같다. 사실 기계적이거나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촬영법은 나랑 잘 맞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위대한 작가들’을 의식하며 찍긴 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유진 스미스 같은 이들이 당시 나에겐 (책에서 본)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처럼 찍을 순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그 이유를, 나는 이 책 <지속의 순간들>을 읽으며 지금에야 그들과 나의 차이가 어쩌면 꽤나 간단한 데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사진가 폴 스트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피사체가 사진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30) 나는 늘 주변 사람들 코 앞에다 카메라를 들이댔고, 그들(대부분이 친구들)은 으레 팔짱을 끼고서 폼을 잡거나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얼굴에 갖다 댔다. 물론 내 생애 두 번 다시 잡지 못할 순간들을 낚아 인화지 보관함에 넣어둘 수 있었던 건 만족스런 경험이었지만.


<지속의 순간들>은 ‘일반인’을 위한 책이다. 오히려 사진 혹은 사진 찍기에 ‘테크니컬하게’ 접근하는 이들에겐 이 책이 생뚱맞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책이 ‘비전공자만이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은유적이고 사색적인 텍스트’라는 얘긴 아니다. 사진 그 자체보다는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그와 동시에 엄연히 사진 역학에 대한 이해를 동반한다면 조금 더 재밌게 읽힐 문학이라 한다면 대략의 첫인상이 설명될까.


제프 다이어는 초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카메라 한 대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는 여행객들이 부탁을 할 때뿐이다. 그것도 그들의 카메라로. 물론 내가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사실은 장애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일종의 순수한 입장에서 사진이라는 매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23) 그리고 다이앤 아버스의 말을 빌려 덧붙인다. “내가 사물의 성질을 일부라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24) 물론 이 문장에는 귀여운 겸손이 담긴 허세가 깃들어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사족이 내비치는 태도에 비해선 훨씬 훌륭하기 때문이다.


사진 하나하나를 대하는 제프 다이어의 관심사는, 찍힌 사진 속 피사체만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가 있다. 이는 존 버거가 몇몇 저작을 통해 수면 위로 끄집어낸, ‘보이는 쪽’과 ‘보는 쪽’의 관계에 대한 성찰과도 맞닿아 있다. 사물과 세상을 보는 시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사진가의 심리학’으로도 들린다.


책에는 수많은 레퍼런스가 휙휙 지나간다. 그리고 그 숱한 참조들은 거시적 차원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은 채 서로 엉키고 섞인다. 아버스는 브라사이를 불러내고, 브라사이는 앞서 나온 게드니를 불러 세우는 데 사용된다. 손에 대한 얘기가 툭하고 던져지면, 그에 관한 썰이 줄줄 흘러나오는 식이다. 제프 다이어는 사진가 아버스의 목에 걸린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스트랜드가 찍은 사진 속 눈먼 여인의 목에 걸린 ‘맹인’이라 쓰인 표식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처럼 횡행활보하는 작법 덕분에 책은 마치 ‘의식의 흐름’에 기댄 수다로 들리기도 한다. 마크 트웨인, 토마스 하디, 사무엘 베케트, 잭 케루엑, 때론 아인슈타인 같은 이들에 관한 풍부한 주석과 인용을 곁들여 그의 글은 참으로 매끄럽게도 잘 흘러간다. (어쩌면 사람에 따라 이런 화법에 익숙해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흥미로운 내용 중 하나는, 화가인 에드워드 하퍼와 사진가인 워커 에반스를 나란히 놓고 썰을 푸는 부분이다. “과거에 대한 집요한 노스탤지어”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 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제프 다이어는 우리를 사진가와 화가의 경계를 넘어 ‘보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시인 마크 스트랜드는 “하퍼는 항상 시간을 묘사하기 위해 빛을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에반스가 카메라를 통해 기억을 불러내고 우리 기억의 일부를 구성하려 했던 방식에도 빛이 중요하게 쓰였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나의 시선 속에 놓여 있는 그 사진가의 시선을 또 한 번 퍼뜩 느끼게 된다.


읽는 동안 가끔씩(일지언정) 존 버거가 떠올랐다는 점은, 저자의 미학적 촉수가 대략 어느 쪽을 향해 있는지 예상해볼 수 있게 한다. 마침 뒤표지의 홍보 문구엔 존 버거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 사실 이 말은 존 버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장이 아닌가. (마침 책장에 꽂혀 있던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을 이참에 다시 꺼내 읽어봤는데, 이 책은 정말이지 최고다!) 결국 흔치 않은 글맛에, 허무감 없는 읽기의 시간이었다는 얘기다. 이제 막 한국에 소개된 ‘외국 유명 저자’의 첫 책치고, 은은하고 적당하게 멋을 풍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2009년에 (한국 [GQ] ‘일반’ 독자들에게도 당분간 관심 1순위의 작가일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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