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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역시 보네거트의 여타 작품들처럼 비관적인 정서가 주류를 이루지만 그의 세상을 보는 태도는 '절대적으로' 비관적이지는 않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말을 나름대로 재인용해보자면,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는 유쾌한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절대적이고 확실한 태도는 아주 가소로운 상태이다. 모든 것은 회의에서부터 시작한다.'라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바로 이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코드라 생각한다.

이 책은 독자를 상당 시간 웃음 짓게 만든다. 저자 특유의 블랙유머러스한 필치도 그렇거니와, 각각의 상황과 대사를 아이러니컬한 웃음으로 버무릴 줄 아는 재간 덕분이다. (작품의 비극적 운명론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령 캠벨과 그의 장인과의 마지막 인사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터뜨리게 하면서도 그 웃음 뒤의 진실을 뒤통수 치듯 강렬하게 전달한다. 또한 그는 풍자와 비유에 있어서도 꽤나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데, 인간의 정신분열증을 '이가 빠진 톱니바퀴'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그런 분열 증세야말로 인간이 가진 축복이라 역설하는 논리는 이 작품에 있어 그야말로 위트의 대박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결말까지 이야기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하는데, 이 가벼운 듯한 형식적 특성이 작품 전반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않는 이유는 사물을 대하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에 있다는 생각이다. 가치 있는 조롱과 냉소의 뿌리는 진지한 성찰과 그로 인한 좌절에 바탕을 두는 법이지 않은가.

이 소설은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도 쉽게 읽힌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사건이나 충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혼잡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고민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이 희화화되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사회 내부의 모습은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리뷰에서 내가 소설과 작가를 비판적 시각 없이, 추앙에 가까운 차원에서 말 그대로 '감상'하고 있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보네거트에 대해 미흡하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꿈꿨다. 그 정도면 됐다. 그거면 족하다. 캠벨은 결국 예루살렘의 형무소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그 역시 이제는 여태껏 자신을 지탱해왔던 일말의 생의 의미를 잃어버렸고, 그의 머릿속은 우주가 돼버렸다.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이쯤에서 족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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