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젊은이의 동일한 죽음
내 나이 또래인 두 젊은이의 죽음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듯한 이야기의 동일한 결말을 본다. 순수한 사랑이 등을 돌린 시점에서 개츠비는 오해와 음모가 절반씩 뒤섞인 흉탄을 맞고 떠났다. 노희경의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이하 우정사)’의 재호는 진실한 사랑의 품에 안겨 다시 눈을 뜨지 않는다. 보라. 지고지순한 사랑, 흔히들 말하는 순애보의 패배와 승리를 보여주는 두 인물의 끝은 동일하다. 주인공의 죽음을 ‘파국’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두 이야기 모두 비극임에 틀림없을게다. 그렇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이하 닉)는 저 비극적 사나이의 이름 앞에 ‘위대한’ 이란 형용사를 붙이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다시 눈을 뜨지 못하는 재호를 품에 안고 눈물 흘리며 ‘나는 그를 깨우지 않겠다’라 말하는 신영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란 슬픔만은 아닐 것이다.
개츠비의 죽음을 마주하고난 다음에야 재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호의 죽음을 이해하고 나니 개츠비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사랑이 완성된 순간 세상을 떠난 재호의 삶도 지고지순한 사랑에 배신당하고 세상을 등진 개츠비의 인생도, 둘의 사랑도 모두 비극적이다. 이 글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바라는 대다수 독자들의 바람을 왜 피츠제럴드와 노희경이 저버릴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추측이자 변론이다.
현대에서 사랑의 조건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를 본다. 잊혀질 여유도 없이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다뤄지는 갈등의 축 중 하나는 연인간의 빈/부 격차다. 부유한 여자(혹은 남자)가 가진 것은 없지만 빛나는 매력을 지닌 남자(혹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당연히 주변과의 불화와 갈등이 뒤따른다. 언제나 주인공은 고민한다. ‘진실한 사랑’을 택하고 모든 것을 버릴 것이냐, ‘적당히 좋아하는’사람을 택하고 지금의 부귀영화를 그대로 안고 살아갈 것이냐.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랑에 대한 고민에서 고려해야 할 주요한 요소 중 하나로 ‘물질적 조건’이 빠지지않고 언급된다는 데 있다. 멀리 갈 필요 없다. ‘진실한 내 사람을 찾았습니다.’라 미소짓는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실은 광고지의 결혼정보회사는 서울대부터 고졸까지, 부모님의, 혹은 자신의 재산에 따라 노블레스부터 C급까지 등급을 매긴다. 결혼이 어디 두 사람만 좋아서 하는 거냐고, ‘집안’과 ‘집안’간의 결합이라 하는 윗세대들의 조언과 당부를 심심찮게 들을 게다. 인정하자.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요소 중 하나는 ‘물질적 기반’이다. 간혹 이런 류의 갈등이 중심축이 되는 드라마에서 표독하게 생긴 시어머니가 내뱉는 말, ‘사흘만 굶어봐라, 어디 사랑이 눈에 들어오나’라는 소리는 이 구조를 꿰뚫고 있다.
개츠비의 사랑을 본다. 한때 죽자살자 사랑했던 데이지는 개츠비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간 부자집 딸로서 자신이 누려온 화려한 생활을 물질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톰과 결혼한다. 이상적인 사랑의 양상에 대한 고찰, 톰의 바람기, 바르지 못한 됨됨이는 그녀에게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 결단이 “사랑이나 돈 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실적인 이유(p. 213)”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주목하라. 군생활에서 받은 마지막 봉급을 데이지와의 추억이 서리진 곳을 찾는 데 소진해버린 개츠비는 아마도 이렇게 뇌까리지 않았을까. “아직도 난 그녀를 사랑해. 그녀가 원하는 ‘황금 모자(여는 시, …황금 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차지해야겠어요! P. 7참조)’ 를 손에 넣기만 한다면, 그녀를 얻을 수 있을거야. 그렇게, 그녀를 얻고 말겠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만만치 않은 물질적 풍요를 차지한 개츠비, 다시 데이지를 만나 그간 자신이 지켜온 순수함을 그녀에게 강요한다. “그에게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그러면 그 일은 영원히 씻겨 나가는 거지.(p. 187)” 그러나 위대하지 못한 사람, 평범한 사람은 순수함을 완벽히 지키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저 사람을 한 번쯤은 사랑했단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도 사랑했어요.(p. 188)” 보라. 물질적 풍요는 평범한 사람의 사랑을, 혹은 그 사람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바를 집어삼킬 수 있다. 혹 그걸 돈지랄하며 기간 동안 쌓인 ‘정’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건, 개츠비가 이뤄낸 순수한 사랑에 대한 자세와 부의 완벽한 결합조차, 평범한 여자의 풍족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일상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길은 도피이다. “겁에 질린 그녀의 눈은 혹시 지금껏 어떤 의지나 용기가 있었다 해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음을 보여주었다.(p. 191)” 평생을 걸고 매진한 목표가 신기루처럼 스러진 남자에게 남은 건 파국 뿐이다. 결국 데이지는 이제껏 익숙해진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주고 앞으로도 그러할 톰 곁에 남아 개츠비의 죽음을 방조하고 만다. 개츠비의 죽음을 전해들은 그녀는 슬퍼했을까? 며칠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톰의 재물과 환락 속에서 생동감넘치는 미소를 지어가며, 간혹 톰의 바람기에 짜증내며 살아갈 것이다. 그게 그녀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이다.
현대에서 사랑의 완성을 찾고 싶다면
그럼 순도 100% 사랑의 완성을 현대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방법은 있다. 조건이 잘 맞아들어가던가(같은 계급의 비슷한 사람끼리 눈이 맞는 등), 아니면 저 무자비한 구조의 힘을 비틀 정도의 극단적 상황이 온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양상을 나는 노희경의 우정사에서 본다. 자신에게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현수와 진심으로 좋아하는 신영 사이에서 갈등하던 재호는 꼬이고 꼬이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수를 택한다. 그 순간 간간히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의 원인이 급성뇌종양임을 선고받는 재호. 절망하며 일에 매달리는 재호를 어떻게든 병원에 데려가고 하는 현수에게 재호는‘이대로 죽어버리겠다’고 받는다. 그러나 재호는 자신의 삶을 하루하루 이어나갈 수 있도록 병마와 싸우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하루하루 더 살아나가려고 안간힘쓰는 것이 신영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고 신영에게 돌아가 그녀 품에 안겨 눈을 감는다. 구조의 힘을 무너뜨린 사랑의 완성에 감동받기 이전 재호에게 씌워진 굴레에 가슴이 미어진다. 보라. 저 무서운 구조의 힘을 비틀고 완전한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한 젊은이의 삶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거꾸로 생각해보자. 뇌종양에 재호가 걸리지 않았다면 결국 현수를 재호는 사랑했을 것이다. 몸 가는데 마음 안 갈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기에. 물질을 사랑의 조건으로 삼는 구조의 힘을 비틀기 위해서는, 이 구조에서 완성된 사랑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뛰어넘는 극단적 상황이 필요하다. 그래서다. 노희경이 순수한 사랑 완성을 설득력있게 그리기 위해서, 재호는 죽어야만했다.
설득력있는 사랑이야기를 쓰는 방법
정리하자. 물질이 사랑의 조건이 되어버린 시대에 완벽히 순수한 사랑을 평범한 사람에게 요구할 수 없음을 피츠제럴드와 노희경은 꿰뚫고 있다. 개츠비의 비극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사랑의 조건과 물질적 기반이 헤어질 수 없는 시대의, 구조의 탓이다. 이 소설의 시대상이 전간기 US자본주의의 황금기, 재즈 시대임을 떠올려본다면 저 시대상을 ‘자본주의 일반’으로 확장시켜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늘였을 때, 아주 씁쓸한 결론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평범한 사람이 사회구조를 뛰어넘어 완벽히 순수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다. 가능해도 그건 보통 일이 아니다. 라는. 이런 구조에서 사랑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리려하는 작가가 택할 수 있는 길도 두 가지이다. 자본주의 현실 구조에서 순수한 사랑이 무너져가는 비극적 양상을 그리던지, 그 무서운 구조의 힘을 비틀 만큼의 극단적 상황을 설정하여 그 완성을 써내려가던지.
군말_두 가지 사실을 남는다.
하나. 개츠비는 진정 위대했다. 순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상황에서 파국적 종말 앞에 서서도 마지막까지 이를 고수하려는 삶의 자세 때문에 말이다. 그러기에 닉은 극히 진취적인 독백으로 개츠비의 삶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을 게다. “그리하려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p. 255)”
둘. 재호와 신영은 진정으로 사랑했다. “내가 신형이 그 사람한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은 전처럼 건강한 모습이 아니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그 여자 때문에 버티려고 하는... 바로 이 모습이예요. 내가 그 여잘 사랑하는 건, 내 인생을 사랑하는 거야.(우정사 41회, 재호의 절규. 우정사의 주제가 압축되어있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