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차고 넘치는 요즘이다. 조엔 롤링의 헤리 포터와 톨킨의 반지의 지배자가 영화화되어 '뜨기'시작한 탓도 있겠고, 디지털 세대의 사람들이 열광하는 비디오 게임과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이 결국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여하튼 중요한 건 하루가 다르게 '신화'를 주제로 한 책과 글이 쌓여가는 데 있다. 그 결과, '신화'를,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루는 책은 양적으로 지난 몇 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늘어났다. 이렇게 정보의 홍수속에 파뭍혀 살 때일수록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을 뿐이라면 판타지 소설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게임과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배경과 그 이름의 유래를 알고 싶은 거라면 신화의 세계에 대하여 간단간단히 요약된 웹 게시물을 찾아 읽던가, 신화 사전을 그때그때 뒤지는 편이 나을게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의 단편적인 모습을 살피고 싶다면 멀게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나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가깝게는 이윤기의 '뮈토스' 등을 읽으면 그걸로 족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은 이렇게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 발 더 나아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관에 대해, 등장 인물들과 에피소드의 배경에 대해, 도대체 왜 그런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까지 내려오는지, 왜 신화를 '인간 모듬살이의 꿈'이라고 지칭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과 또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그 길라잡이는 바로 '로고스(logos)', 즉 이성적인 통찰력이다.
이윤기는 자신이 세 권으로 정리하여 풀어 쓴 그리스 로마 신화 세 권의 책 제목을 '뮈토스(mythos: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허구의 이야기. )'라고 붙였다. 논리적으로 설명될 필요가 없는(설명할 수가 없는. 이 아니다)이야기, 그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지닌다는 뜻에서 그런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묶은 책에 '뮈토스'라는 이름을 붙인 행위 자체가 지극히 뮈토스적이다. 그렇기에 이윤기의 '뮈토스'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 자체에 빠져들고 열광하게 된다. 뮈토스적 화자는 뮈토스적 독자를 낳는 법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의 이 책은 제목부터가 지극히 로고스적이다. '그리스 신화의 세계'. 저자는 그저 재미있고 허황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들의 뿌리와 근원을 하나하나 캐어 나간다. 이를 위해 그리스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저자의 풍부한 언어학적 배경 지식과 글로 쓰여진 역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를 풀어가는 인류학, 고고학적 지식, 그리고 그 지방의 지리학적 지식까지 저자는 총동원시켜 하나하나 이야기의 뿌리를 캐어 나간다. 이 방법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언어학적 지식: 등장하는 모든 신의 이름을 음절과 형태소로 끊어 그 기원과 뜻을 밝히면 몇천 년 전의 사람들이 숭배했던 초자연적 존재의 대상과 그 성격이 드러난다. 저자는 주신 디오니소스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에 대한 형태소 분석 몇 개 만으로 소아시아 지방의 지신(地神)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편입되었음을, 가부장 사회의 신이었음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는 과정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학적, 고고학적 지식: 제우스의 아내 헤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여신의 설화를 시대순으로 설명하면서, 점점 이들의 권능이 미약해짐을 지적하고있다. 모계 사회의 전능한 여신 헤라는 그리스 신화에 편입되며 제우스의 난봉질에 투기를 일삼기만 하는 가부장 사회의 본처 역할로 축소된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인간의 운명을 제우스라는 절대신의 간섭 없이 쥐고 흔들던 아프로디테는 뒤로 갈수록 힘이 미약해져 인간 남자의 몸과 마음을 얻고자 거짓을 몸에 두르며 사랑을 갈구한다. 이런 설화 속 여신의 권능 축소 과정을 문명의 변화에 따라 모계 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되며 여자들의 힘이 축소되는 과정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저자의 능력은 놀랍다.
지리학적, 역사학적 지식: 제우스와 아폴론, 그리고 포세이돈 등의 강력한 신들은 어찌 보면 다들 난봉꾼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예쁜 여자가 보이면 신으로서의 체면 염치 다 접어두고 왼다리짓을 해 댄다. 저자는 이를 그리스 신화가 그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며 각 지방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나는 너희 평민들과 다른 혈통을 지녔다'는 신성화 작업의 일부로 해석한다. 그 전래 통로까지 살피는 건 물론이다.
이렇듯 저자는 몇 가지 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 신화를 통해 몇천년 전 사람들의 살림살이 양상을 손에 잡힐 듯 복원시킨다. 그의 눈을 통해서 신화는 그저 이야기로 머무는 게 아니라 문자가 없던 시절의 은유를 통한 역사적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작은 글씨로 1차적인 신화 내용을, 조금 큰 글씨로 그 해석을 제시하는 책의 구조상, 1차적인 신화의 이야기 전달이 다소 딱딱한 구석이 있다는 걸 단점으로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신화 컨텐츠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능력은 이윤기나 오비디우스, 혹은 다른 훌륭한 저자들에 기댈 수 있으나 유재원의 이 책만큼 통찰력있게 이성적으로 뜻모를 이야기의 의미를 풀어나가는 책도 없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나, 이윤기의 '뮈토스'정도와 같이 서가에 꽃아두면 훌륭히 균형이 맞지 않을까 싶다.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신화를 받아들인 사람이 한 발자욱 더 나가고 싶을때 강력히 권해주고싶다. 몇 년 전 학교다니던 때 이 책에 열광하던 매너가 다시 이 책을 읽고 싶어 검색했을 때, '절판'이란 빨간 글자가 알라딘에 찍히는 순간 헉겁한 나머지 할인 한 푼도 안되는 서점에서 잽싸게 주문하고 받은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차적 이야기 전달에만 머무는 신화 서적이 대부분인 요즘 이 책 옆에 붙은 붉은 글씨는 너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