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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책방

내가 읽는 글들의 절반은 원문이며, 절반은 번역서이다. 번역이라는 것이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모래를 쌓아올리고, 동그란 그릇을 찍으면 스폰지 케Ÿ?모양의 모래가 나온다. 혹은 별모양 얼음틀을 찍으면, 별의 모래가 된다. 번역서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종종 어떤 작가의, 특히 외국인 작가의 소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 때에는 그 작가의 글은 죄다 사들이곤 한다. 글이 내 머릿속에서 똑같이 나와줄 순 없으니 대신 책을 읽고 사서 모아서 책꽂이에 꽂아놓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림자처럼 작가의 이름 아래 번역자의 이름이 나란히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김난주가 거의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다 시피 하는 것. 종종 원문의 문체도 그러한지, 궁금한 경우가 많을 적에는 아마존에서 따로 책을 구입하거나 외국에 있는 이에게 부탁을 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나는 종종 헛갈린다. 내가 읽은 것은 까뮈인가 김화영인가? 내가 읽은 것은 하루키인가 김난주인가? 내가 읽은 것은 존 파울즈인가 김석희인가?

 

작가의 글을 번역가가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의 필터가 아닌 다른 필터를 거치면, 그 작가가 꼭 외도를 한 듯한 기분을 부러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런 마당에, 차라리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은 자신의 필터가 어떤 것인지를 고백하는 참회서 같기도 하다. 십수년간을 방랑하다가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아들 마냥 그는 얌전하다.

 

모든 여행서는 떠나는 설레임이 돌아다니는 행동력에 우선하는데, 김화영은 내도록 돌아다니는 행동력을 과시한다. 얌전히 가야할 곳을 계획한 다음 그 곳을 가서 사진을 먼저 찍고, 손에 든 수첩에 메모를 하던 수학여행을 온 중학생같은 다소곳한 자세이다. 여행 내도록 김화영이 어떤 식으로 흐트러지거나 남다른 감회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읊는 생각은 일차적으로 카뮈와 지드의 필터를 거친다. 이번에는 작가가 번역가의 입을 통해 말을 하는 순서이다. 혹은, 번역가가 작가의 뒷그림자를 밟아나가려는 과정이라 보아도 좋다. 내도록 작열하고, 허물어져가는 알제리에서 번역가 김화영이 찾는 것은 철저한 현장답사이며 고증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어서, 개인의 감정이나 알제리가 주는 마력은 뒷전이다. 이것이 꼭 좋고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현장답사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명확하게 체험한 기분이다. 이를테면 김화영은 오랑은 어떤 시인가, 를 묻지 않는다. 대신 `카뮈의 오랑은 어떤 곳인가'라고 묻는다. 바다가 있는데도 바다를 등지고 앉은 도시를 보고 이방인 뫼르소가 느꼈을 작열하는 태양을 본다. 아예 직각으로 꽂히는 태양빛까지는 만끽하되 그러나, 고양이를 향해 침을 뱉던 노인까지 찾아내지는 못한 것은, 김화영의 무게중심이 `이방인', '결혼'에 있어서이지 '페스트'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음을 보여준다. 어느 번역가나 호오를 가지고 있고, 취향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라고 수줍게 그러나 당연하게 말하는 것을 보는, 인터뷰이의 모습이 보인다.

 

하드웨어적인 물질에의 고찰

이보다 더 정직한 표지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페이퍼 커버를 벗겨내면 나오는 하드커버는 정말 무미건조하다. 그저 정직한 표지 하나가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컬러로 들어간 사진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도를 아주 정확히 맞추지는 않았더라도 김화영이 실은 사진들은 그 하나하나가 당분없는 호밀빵처럼 정직해 보인다. 노인이 부리는 작은, 그러나 최대한의 사치인 네스카페가 보이고 사막의 풀이 보이고 무너져가는 호텔이, 어린 카뮈가 보았을 마을이 보인다. 이 책은, 최대한 뺄 것을 빼고 꼭 해야할 말만을 실은 개인적인 연애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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