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영성, 사랑의 약속으로 남다
biche7923 2026/06/11 21:57
biche7923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신애론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 21,600원 (10%↓
1,200) - 2026-05-08
: 600
1115년, 한 수도자가 동료들을 이끌고 인적 드문 숲속으로 들어간다. 세속과 등을 진 그들이 발길을 멈춘 곳은 도적들의 은신처로 전해지던 음습한 골짜기, 고립된 황무지에 가까운 땅이었다. 바로 그 땅에 수도자는 클레르보(Clairvaux), 빛의 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황량한 골짜기에 뿌리를 내린 베르나르도는 동료들과 함께 기도와 노동의 삶을 시작한다. 척박한 땅에 뿌린 씨앗은 사랑과 겸손,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대한 깊은 성찰로 자라났고, <신애론>은 그 사유의 한 정점으로 남게 된다.
총 2부로 구성된 <신애론>은 베르나르도의 원전과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의 해제를 함께 담고 있다. 책의 이해를 돕는 해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나는 원전부터 펼쳤다. 피아조니의 해석을 경유해 베르나르도를 만나기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언어와 먼저 마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신 경험해 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본질을 말하는 책 또한 나만의 독법으로 깨우쳐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사랑
베르나르도는 사랑을 네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철저히 자기애에 갇힌 사랑이지만, 베르나르도는 이를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에, 그는 이 낮은 자리를 사랑의 출발점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가장 깊은 사랑은 골짜기에서 시작되며 존재 안에서 끝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야말로 자기에게 갇힌 사랑을 확장하는 첫 번째 문이라고.
두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다만 여전히 자아라는 틀에 갇힌 사랑이다. 신을 찾지만 오직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단계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이 불순함마저 기꺼이 끌어안는다. 사랑은 본래 이렇게, 제 필요에 떠밀려 시작되는 법이니까.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게중심이 하느님에게로 옮겨간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들어서는 순간, 자아라는 굳건한 성채가 무너지고 육체의 모든 감각은 오직 한분만을 향하게 된다. 줄곧 안으로만 파고들던 사랑이 마침내 유일한 진리를 마주한 것이다. 인적 드문 골짜기에서 하느님을 열망했던 베르나르도처럼.
네 번째 단계는 가장 낯설고 심오하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언뜻 첫 단계와 비슷한 지점같지만, 그 사랑은 더 이상 미성숙한 자기애에 머물지 않는다. 끝없이 안으로만 침잠하던 사랑이, 이제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이 망아의 정점을 탈혼(excessus)이라 부른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단언한다. 이 마지막 여정은 현세에선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합일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라고.
탈혼은 육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베르나르도가 기다리는 것은 육신의 부활이다. 모든 연약함을 벗어난 영화로운 육신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번째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이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클레르보라는 이름이 다시 보였다. 베르나르도가 발견한 골짜기는 어둠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기도와 노동 속에서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마주했다. 그가 말한 사랑의 네 단계도 다르지 않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보상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의 결핍에서 비롯되어 존재를 관통해 그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내 안에도 어둡고 습한, 오래된 골짜기가 있다. 신앙은 그 골짜기를 메워주진 않았다. 다만 그 어둠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 골짜기가 그분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
채워지지 않는 자리, 그 결핍의 공간이야말로 빛이 스며드는 문이라는 걸, 베르나르도는 아홉 세기 전 클레르보의 어둠 속에서 그 진실을 발견했다.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