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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 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 14,400원 (10%800)
  • 2025-08-28
  • : 790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거장이자, 철학과 신학을 통합한 독창적 사유 체계를 세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추상적 이론이 아닌 하느님의 드라마로 해석한 신학자다. 그에게 신앙은 하느님을 멀리서 관망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시선 안에서 그분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주체적 행위였다.

<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는 말씀(Logos)을 관념적 세계관에 가두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추상적 원리가 아닌 구체적 인격이며, 신앙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편의 드라마다. 발타사르는 단언한다. 그리스도는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변화는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나,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p.66

말씀은 단순한 활자들의 배열이 아니다. 신앙 또한 복잡한 이론이나 관념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말씀 안에서 그분의 얼굴을 마주 보고, 끊임없이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
매일 성경을 읽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지만, 내 신앙은 여전히 문턱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이에게 빛을 찾아주셨던, 그분의 기적 앞에서도 반신반의했던 바리새인.
그 냉담한 관찰자의 그림자를 나는 내 안에서 발견한다. 입으론 줄곧 믿음을 외치면서도, 타성과 관념의 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올 때마다 성모님을 바라보라고. 말씀을 온몸으로 품으셨던, 그분의 순종을 본받으라고.

오히려 마리아처럼, 자신에게 혼란스럽고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길을 기도하면서 따라갈 것이다. p.113

성모님은 아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믿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성모님의 응답(Fiat)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영혼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였다.
요셉을 잃고 가난한 과부로서 삶을 이어가며 어린 아들을 키웠던 성모님. 장성한 아들이 나자렛을 떠났을 때도 그저 말없이 지켜보셨다. 의심과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으셨던 천주의 모후.

성모님은 신학자가 아니었다. 화려한 언변도, 학식조차 없던 평범한 나자렛 여인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했기에, 하느님은 그 사랑에 응답하셨다. 한 여인의 순수한 믿음이 하느님 구원 드라마의 중심이 된 것이다.
하느님을 믿었지만 반쪽짜리 신앙에 머물렀던 바리새인, 관념에 사로잡혀 말씀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 그들, 그리고 그들의 전철을 밟고 있던 나에게 저자는 속삭인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라. 너는 이미 말씀 안에 있으며, 그분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이해와 논리로 신앙을 분석하지 말아라. 그저 함께 머물러라. 십자가 아래 성모님처럼.”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신앙을 추상적 관념으로 이해하지 않으셨던 성모님. 의심과 불안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가셨던 성모님을 통해, 발타사르는 신앙의 본질을 밝혀낸다. 십자가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나는 표지이자, 인간의 나약함과 어둠이 그리스도라는 형상과 하나되는 자리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정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신앙의 신비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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