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여정, 한 줄기 빛
biche7923 2025/05/2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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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움가트너
- 폴 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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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 - 2025-04-30
: 2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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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물에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면 애나는 지금 살아 있겠죠. 하지만 애나가 원하는데 물에 들어가는 걸 내가 막으려 하거나 그랬다면 우리는 30년 이상 함께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삶은 위험해요. 매리언, 언제라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중략)솔직히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도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에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p.41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는 그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중략)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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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죽었다. 하지만 바움가트너의 감각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아내와 공유했던 시간 속에 머문다. 그녀가 남긴 기록을 더듬고, 흘러간 세월을 복기하며, 기억의 층위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그 손끝에서, 애나는 끊임없이 소환된다.
이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지고, 폴 오스터는 '눈부신 역설'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상실 이후에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식적 비존재’라는 사유로 드러나며,
주인공의 애도는 기억을 복원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애나가 남긴 기록으로 그녀의 소멸은 유예됐다. 감각의 수면 위로 떠오른 아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바움가트너는 살아간다.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지워가며 홀로 서 있는 바움가트너.
그 쓸쓸한 여정에 스며든 한 줄기 빛이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닿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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