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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 드디어 만나는 북유럽 동화
  • 페테르 크리스텐 아스비에른센
  • 16,650원 (10%920)
  • 2025-04-18
  • : 6,454
🌿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다. 주말을 제외하면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어쩌다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늘상 언성을 높이며 다투시는 부모님 때문에 동생과 나는 자리를 피하는 순간이 많았다. 잔뜩 핏대를 올려 아빠를 비난하는 엄마와 집안이 떠나갈듯 고함을 지르던 아빠.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런 동생을 애써 달래며 함께 작은 방으로 피신했다. 우리 남매의 유일한 방공호였던 공간으로.
그리고 어깨를 맞댄 채 비디오를 봤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웅크린 고양이들처럼.

거실 귀퉁이에 매달린 벽시계가 무겁게 울리고, 고막을 찌를 듯 날카롭게 울리던 소음이 간신히 잦아들어 낮은 속삭임으로 이어질 때 동생은 안도하듯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엄마가 잠든 동생을 침대에 눕히고, 꺼질듯한 한숨을 남긴 채 부엌으로 갈 때까지 나는 멍하니 화면만을 바라봤다. 나는 온몸으로 가시나무를 끌어안은 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던 눈망울엔, 커다란 이슬처럼 부풀어오른 슬픔이 맺혔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정적 속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동생의 숨소리, 그 평온한 숨결을 호흡하듯 화면 속 여자는 모든 것을 비워낸 얼굴로 눈을 감는다. 침묵의 그늘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그와 공유했던 세월을 떠올리며 기도하듯 맞잡은 두 손.

지상에 홀로 남은 그녀의 삶은 한 작가의 손끝에서 영원으로 거듭났으며,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로 남았다. 슬픈 꿈에서 막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의 멍한 감각. 그 아련한 여운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데르센. 나는 어릴 때부터 안데르센을 비롯한 북유럽 동화 특유의 느낌이 좋았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살벌한 눈빛으로 대치하던 부모님, 그들을 피해 은밀한 방공호로 몸을 숨겼던 어린 남매. 오프닝 곡과 대사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끊임없이 재생했던 비디오, 이야기에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막연한 공포와 슬픔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유년기를 어루만지듯, 장막처럼 떠올랐던 오로라. 그 신비스런 빛깔이 나는 좋았다. 손등으로 떨어졌던 눈물처럼, 영롱한 빛깔이.

성인이 된 지금, 이제 와 다시 그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때 느꼈던 감각들이 어릴 적보다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뚜렷한 형상조차 갖추지 못했던 슬픔이 제각각의 이름으로 말을 건네는 느낌.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를 부여받은 슬픔, 그 얼굴들을 확인하듯 나는 책장을 펼친다. 허공 속 먼지로 흩어진 그날의 소음들과 엄마의 붉은 눈시울을 떠올리며.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빠의 목소리를.

슬픔의 마지막 이름을 이제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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