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사마리아 여인
biche7923 2024/09/2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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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2
- 천주교서울대교구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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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 2008-10-30
: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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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난 일을 낱낱이 아시는 분...p.172
2016년 5월,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아빠를 간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병실 커튼을 젖히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학병원 사목으로 계시는 초로의 수녀님께선 아빠의 세례명과 인적 사항 몇 가지를 여쭤보시더니 수술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다. 병실을 떠나기 전 인사하는 내 어깨를 다독여주시던 수녀님의 손길은 오랜 냉담으로 닫혀있던 마음을 다정한 온기로 두드렸고, 아빠의 장례 미사를 치른 후 나는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를 잃은 상실의 아픔과 친척들 포함 가까운 지인들에게 받았던 상처 때문에 하느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의탁하기는 좀체 쉽지가 않았다. 십 년이란 공백을 깨고 다시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과연 이것이 진정한 부르심인지, 하느님의 섭리란 대체 무엇인지 부족한 내 신심으론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리석은 청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저질렀던 과거의 죄악과 허물들은 여전히 하느님과 나 사이에 장애물로 남아 있었고, 몇 번의 고해성사로도 영혼에 새겨진 얼룩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면의 갈증을 품고 종일 우물가를 지키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괴로워하던 나는 누가 봐도 '하잘것없는 사마리아 여인 p.172'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과거, 나의 현재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아시는 p.172'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은 그때 내겐 불가능했다. 하느님의 시선과 세상의 관점은 다르다는 걸 몰랐기에 나는 매번 똑같은 신앙적 오류를 반복했다. 습관적인 미사 참례와 묵주 기도로 겨우 마음을 잡으며 살아가던 내게도 조금씩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별 생각없이 뒤적였던 시편 한 구절로 내게도 FiatLux가 찾아온 것이다.
'저는 멍텅구리,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저를 이끄시다가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다.' -시편 73:22~24-
내면의 결락을 다스리지 못해 과거의 죄악 속에 갇혀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홀연히 찾아오셨던 예수님. 먼길에 지쳐 행색이 남루했던 예수님이 물 한 모금을 청하자 냉랭하게 대꾸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바로 내 자화상이었다. 그분을 지척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왔던 나, 삶의 무게중심이 없어 사소한 일에 비틀거리고 쓰러지던 내 곁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시던 예수님을 나는 목전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강생의 신비로 당신을 남김없이 비우시는 하느님의 가난'p.176을 헤아릴 수 없던,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던 내가 그분의 빛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괴로워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순간, 그분이 건네는 사랑에 마음을 열던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음성을 나도 모르게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보잘것없는 한 여인을 위해 먼 길을 찾아오셨던 예수님. '아주 조용하고 여린 소리 속에 계셨던 p.179' 그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나의 교만과 아집은 숱한 방황과 오류만을 낳았을 뿐이였다. 하느님은 강풍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길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칠 법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형상으로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네는 분이셨다. 팔 년 전, 병상의 아빠를 지키고 있던 내게 홀연히 다가오셨던 수녀님처럼.
세상의 변방에 머물러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마리아 여인들에게 몸소 찾아가 말을 건네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셨던 추기경님의 글을 읽으며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던 독서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마리아 여인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물가를 서성이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을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상처를 감싸주시고 다독여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미약하게나마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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