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던 대학 도서관 일반대출실, 밤 8시반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도서관이 지하였던 탓에 책을 다 읽고 출구로 나가는 길이 마치 잠수함에서 나가는 것 처럼 느껴졌었던 밤. 그 이후 김중혁 작가의 책은 소설이든 에세이든 무언가 출간 되면 다 무조건 구매했다. 그 밤이 내게 줬던 이야기들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었으니까.
사실 모든 책들에 우와- 했던 것은 아니다. <좀비들>을 읽고는 응? 하기도 했고, <뭐라도 되겠지>를 읽곤 아 정말 특이하다 했다.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던 느낌을 능가하는 뭔가 강력한 한 방은 없었달까. 이번 책 예판 소식이 뜨자마자 예약구매를 누르고도 그닥 미친듯한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이번에도 이 작가를 처음 만났던 그 밤과 같은 느낌은 없을거야!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이런 저런 느낌 빼고 수식어 빼고 이번 소설, 정말 재밌다!
의뢰인의 사후, 그가 원하는 물건을 영원히 세상 밖으로 퇴출 시켜주는 '딜리팅'. 그리고 그 딜리팅을 감쪽같이 해내는 구동치는 유능한 딜리터다. 전직 형사의 꼬리를 달고 있는 그는 의뢰인들의 '비밀'이 담긴 물건들을 그 죽음 이후 완벽하게 세상에서 분리해 자신의 세계에 안치한다. 신뢰를 먹고 사는 그의 직업적 특성상 그는 완벽하게 딜리팅을 수행해 낸다. 특이한 그의 직업을 빼면 단순하던 그의 세계에 선배 형사인 김인천의 '배동훈 살인사건'이 고개를 내민다. 우연히 배동훈 또한 그의 고객 이었고 그의 의뢰물품이었던 '태플릿피씨'를 추척하며 이야기는 펼쳐진다.
배동훈과 이영민, 천일수, 이강혁, 원수도장의 나영욱 등등 어디하나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점점 속도감을 높인다. 구동치의 사무실을 노크 하며 일어났던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진다. 그 속에서 딜리터 구동치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절망한다. 그의 사무실 속 한 세계 였던 의뢰물품들은 결국엔 그 조차 지배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아주 추운 나라, 노르웨이로 떠난다.
죽고 난 이후의 삶. 내가 죽더라도 이 세상의 시계는 정말 태연히 돌아갈 것을 알기에, 우리는 사람들 기억속에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누구에게나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그 욕심의 끝. 어느 한 사람의 비밀이, 그리고 그 그림자가 월요일 처럼 길다는 표현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정말 딱 맞는 표현이다. 월요일 처럼 긴 비밀의 그림자가 남아있는 우리에게 기쁨일지 슬픔일지는 나의 판단의 영역은 아니지만, 이왕 이면 기쁨이었으면 하는 것도 아마도 욕심. 마음이 움직이면 다른 것도 움직일 것이다.
ps. 처음 배송되어 온 책이 신기한 순서를 가진 파본 (304p 뒤에 289p, 289p 뒤쪽으론 321p.....) 이어서 알라딘에 재빨리 연락해서 교환했다. 다행히 사인본으로. 처음에 책 받았을때 사인이 너무 예뻐서 찍어둔게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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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두 사람의 그림자의 방향이 다르다 :) 센스쟁이ㅋ 근데 파본 책에 있는 사인이 더 내 스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