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 보아도 '저곳' 이라는 이상이 '이곳'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핍과 절박함 속에 머물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사라져버린 활력소를 또다시 갈망하게 되는 게 아닐까.-43쪽
"우울증은 게으름과 무척 닮았습니다. 분명 그것은 게으름의 일종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게으름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견뎌 낼 힘을 비축하면 일이 순조롭고도 생동감 있게 진행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모든 활동에서 진정한 만족감을 발견하게 되겠지요."-49쪽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죄악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죄악이 되지 않을까요. 하물며 각자에게 허락된 즐거움을 서로 가로채 가는 상황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요? 우울증을 앓는 사람 중에 주위 사람들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아무런 내색도 않고 혼자 감내하는 위인이 있다면 어디 말씀해보세요! 우울증이라는 게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마음속의 불쾌감, 말하자면 자기모멸감 같은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바보 같은 자만심에서 비롯된 질투심과도 항상 연결되어 있죠. 그래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행복한 사람의 모습만 봐도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죠."-50쪽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 내 한마디만 더 하겠네. 세상일이라는 게 흑백논리로 결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네. 매부리코와 사자 코 사이에도 높이와 모양에 따라 수많은 단계가 있듯이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방식에도 다양한 명암이 존재한다네.-66쪽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네."어느 정도까지는 잘 견뎌내던 기쁨, 슬픔, 고통 같은 감정들은 어떤 한계를 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사람이 강하다든가 약하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윤리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 모두에서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비겁자로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악성 열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니까요."-73쪽
모든 것이 다 스쳐지나갈 뿐인데도 자네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까닭에 존재하는 데 필요한 기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아!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가라앉았다가 바위에 부딪혀 깨져버리고 마는데도 말인가?자네과 자네 주위의 사람들을 소진케 하지 않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고, 또 매 순간 자네는 파괴자이며 파괴자가 되지 않을 수 없네.-80쪽
분명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과 비교하고, 또 반대로 우리 자신을 다른 것과 비교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와 관련된 대상에 달려 있는 것 같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고독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해야겠지.(중략) 반면에 우리가 아무리 약점투성이 존재이고 넘어야 할 난관이 많다고 해도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느린 걸음일지언정 돛을 달고 노를 저어가는 사람들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등하지거나 그들보다 앞서 나감으로써 진정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게 되는 걸세.-94쪽
사실 지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최고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 같은 인간들이지! 왕은 장관에게, 그리고 장관은 비서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보기에는 상대방의 모든 면을 파악한 후, 그들의 힘과 열정을 제 계획을 실현하는 데 발휘하도록 하는 역량과 책략을 가진 사람일세.-99쪽
그렇다네. 나는 그저 나그네에 불과해. 세상을 떠도는 순례자에 지나지 않지. 그런데 자네들은 그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가?-115쪽
나만 이 모양으로 사는 건 아닐 테지. 모든 사람이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신당하게 되어 있으니 말일세.-117쪽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네. 현실을 직시하라! 이 집에서 너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너의 두 친구들은 너를 존경한다. 너는 가끔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며 네 마음도 그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거라 느낀다. 그런데 이제 네가 떠난다면, 네가 이들과 이별하게 되면? 그들은 너를 사실함으로써 운명 속에 생겨난 공허감을 얼마나 오랫동안 느낄 것인가? 대체 얼마나 오래? 아, 인간이란 이처럼 덧없는 존재라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도, 자신의 현존에 대한 유일하가도 참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곳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과 영혼 속에서도 인간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사라져버려야만 하네. 그것도 순식간에!-129쪽
"자네는 구제받을 수 없네, 불쌍한 인간아!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네."-150쪽
"그녀의 존재와 운명, 그리고 내 운명에 대한 그녀의 연민이 다 타서 눌어붙은 나의 머리에서 마지막 남은 눈물을 짜내고 있네.
장막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야!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주저하고 망설이지? 장막 뒤의 모습이 어떨는지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영영 되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인가? 그 무엇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곳에는 혼란과 암흑만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것이 우리 인간 정신의 특성이겠지."-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