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뒷 단은 김영하 작가의 소설 제목으로도 쓰였던 이 구절. 프랑수아즈 사강이 남긴 말이다. 흘려만 듣던 사강을 처음 접한 건 백영옥 작가의 장편소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였다. 심상치 않았던 주인공 윤사강의 이름에서부터 소설 내내 등장하는 「슬픔이여 안녕」까지. 현재 읽고 있는 한 책에서 다음에 읽을 책을 '꼬리물기' 하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선 딱 알맞은 떡밥 이었으나,「슬픔이여 안녕」번역판의 비주얼이 너무 '구린' 탓에 그냥 잊고 살았다. 그러다 배우 신세경의 인터뷰 기사에서 발견한 '괜찮은' 이 아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만나게 되었다. 가끔 어떤 책을 읽게 되는게 '만나다'는 동사와 참 어울리는 그런 책들이 있다.
- 이건 정말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일까? 시간이 만든 습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한번의 이혼경력이 있는 서른 아홉의 폴은, 로제와 안정적인 연애생활을 이어 나간다. 안정적이지만 '뭔가 빠진듯 한 연애'.
폴은 가슴 깊숙히 박이는 고독감을 안고 산다. 로제 또한 폴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더 '안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외려 무시한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보다 그는 혼자 거리를 걷고, 배회하고 또다른 늦은 밤의 기회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의 연애는 시간이 만들어준 안정에 기대어 있었다. 어느 순간 찾아온 틈에 끼어든 것은 스물 다섯의 청년 시몽. 그는 폴에게 빠져 적극적인 '수작'에 나선다. 로제와의 고독한 관계에 힘들어 하던 폴은 조금씩 시몽에게 마음을 열어 로제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하지만 결국엔 시몽에게서 돌아서 버린다.
로제와 폴은 다시 만나며 '당신이 없어 참으로 불행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며 다시금 예전의 안정적인 관계로 돌아간다. 폴은 로제의 품에 안기며 구원받은 느낌을 받지만, 아울러 다시 길을 잃은 듯한 느낌 역시 찾아온다. 로제는 다시 안심하고 그녀를 혼자 둔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이라는 습관에 기댄 그들의 관계는...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