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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질하는머리
우리 시대의 창의성
고자질하는머리  2025/05/04 15:38
  • 크리에이티브의 시간들
  • 프랭크 배런 엮음
  • 19,800원 (10%1,100)
  • 2025-04-14
  • : 290

# 39번의 대화

프랭크 배런의 ⟨크리에이티브의 시간들⟩은 창의성을 주제로 39편의 에세이를 소개한다. 헨리 밀러, 페데리코 펠리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어슐러 K 르 귄, 이탈로 칼비노, 이사도라 덩컨 외 (과학자인) 리처드 파인만, 캐리 멀리스 등 '창작자'들이 남긴 39개 글을 6부로 나누어 묶었다. 6개의 테마로 배런의 표현처럼 "창의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제공한다.


여섯 개 테마는 다음과 같다.

1부 고스란히 드러난 마음

2부 열린 마음

3부 상상력의 그물

4부 창의의 생태학

5부 장인 정신에 대한 헌신

6부 벌거벗을 용기


배런이 쓴 머리글은 '이 대화'에 방향키를 제시한다. 창의력, 상상력에 관한 글을 읽노라면 미궁에 던져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 가닥이 실이 절실하다. 심리학과 교수이자 창의력 연구가인 배런은 머리글에서 창의력과 지능의 관계, 자신의 연구 지침과 방향성 등을 설명한다. 책에 실린 39개의 글은 '에세이'로 묶이지만, 산문을 비롯하여 인터뷰/대담, 서문, 강연에서 발췌한 다양한 글이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나는 작가도 있다. 다소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머리글과 더불어 각 부와 글에 관한 개괄이 없었다면 실 한 가닥이 아니라 한 타래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뒤에 실린 창의력에 관한 추천 도서, 각 에세이의 출처는 독후 여흥을 돋워준다. 


글 선정이 특정 집단 — 20세기 서구 백인  — 위주라는 한계도 분명하지만 (배런은 이 점을 쿨하게 인정하고 들어간다) 이러한 문제 인식은 독자와 엮은이 모두에게 중요하고 독서의 좋은 지침이 된다. 이렇게 구성한 39개의 글, 6개의 테마는 단계적이 아니라 서로 맞닿아 있다. 엉켜 있다. 상상력의 그물이 벌거벗을 용기이기도, 고스란히 드러난 마음이 장인 정신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다. 목차대로 읽지 않아도, 아니 내 "마음속으로 선택한" 테마를 좇아 책을 펼쳐도 좋겠다.




#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성

상상력은 어떠한 작용으로 이뤄질까. 상상력은 이미지와 사고의 흐름을 조율하는 것이다. 3부 ⟪상상력의 그물⟫은 이 조율 작업을 그물 짜기로 개념화하여 창의성의 본질에 그물망을 던진다. 메리 셸리와 융은 혼돈과 무의식에서 인상을 (재)배열하여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은 과정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은 공허가 아니라 차라리 혼돈이다. '인상의 소나기'라는 표현처럼. 


이 인상의 소나기는 비단 예술 창작뿐 아니라 정신 분석, 인지 과학에서도 유효하다. 이탈로 칼비노는 ⟪가시성⟫에서 "실제 깨달음이란 환상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이미지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라는 더글러스 호프스테터의 말을 인용한다. 장 스타로뱅스키의 ⟪상상력의 제국⟫을 통해 상상력의 탐구를 이어가는데 여기서 지식 도구로서의 상상력과, 세계와 합일하는 상상력을 발견하고 묻는다. 내 창작의 동력이 되는 상상력은 어느 길에 속하는가. 칼비노는 자신의 창작 과정을 되짚으며 스타로뱅스키가 그린 경계에 또 다른 세계를 세운다. 지식과 진리는 형제이고 현실과 환상은 엉켜 있는 곳. 시인의 마음과 과학자의 정신은 선택과 연결을 통해 패턴을 조립한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지나며 새로운 가시성의 획득은 이 경계에도 새로운 선을 그을 것이다.


3부에서 ⟨말과 사물⟩의 서문을 맞닥뜨리니 조금 당황스럽다. 푸코가 탐구하는 인식론을 상상력의 그물로 엿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지만, 용어부터 일단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도 사실이라. 보르헤스가 소설에서 인용한 '중국의 어느 백과사전' 얘기에 껄껄 웃었다는 푸코. 일단 '해부대 위 우산과 재봉틀'을 그려 본다. 해부대가 사라져 공통된 기반이 파괴된 채 덩그러니 남은 우산과 재봉틀. 이것이 중국의 어느 백과사전이다. 헤테로토피아다. 현실을 교란하고 틈과 사이, 결핍과 혼돈이 난무하는 공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의 한계를 넘어설 잠재력을 보여주는 곳. 상상력의 그물이 짜이는 곳.


푸코가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개념으로 제시한 에피스테메가 그러하듯 창의력 역시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성에 따를 것이다. 자기 인식의 힌트를 얻게 된 19세기, 자기중심적 사고가 가능해진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는 어떤 창의성의 문이 열릴까. 


지금 시대의 중국 백과사전은 더는 헤테로토피아가 아니다. 포스트모던 이후 서구의 거대한 유토피아로 뻗어나간 이 공간은 급기야 틈은 메워지고 사이는 없어졌다. 이제 다시 새로운 그물망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 다음 시대의 과제 아닐까. 추상적이고 난해한 철학 개념을 칼비노가 그런 것처럼 상징(이미지)으로 그려보며 3부의 대화를 마친다.  




# 일상생활의 조직자

기술 발전과 함께 AI 창작에 관해 철학적, 제도적 논의가 활발하다. 문득 다다의 '우아한 시체 놀이'가 떠오른다. 우리 인간은 인공지능의 시와 다다이스트의 시를 구별할 수 있을까? 창의성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인식과 평가는 크게 달라진다. 어린 시절 나도 저렇게 그리겠다고 호언장담한 피카소의 그림은 이제 다르게 보인다. 여전히 피카소처럼 그릴 수 있다고 해도(정말로 그렇다는 건 아니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감상의 역할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적 기교'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고스란히 드러난 마음⟫과 ⟪장인 정신에 대한 헌신⟫은 창작의 영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애나 핼프린이 표현한 자아의 침몰, 오이겐 헤리겔이 말하는 영적으로 활을 당기는 경험이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이다. 궁사는 과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겨냥해야 한다. 매리언 밀너는 그림을 채색하는 과정은 자신과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형성하는 관계를 인식하는 작업이라고 성찰한다. 


창작과 감상 두 영역은 상호 침투적인 관계에서 고유의 창의력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새로운 시대의 창의성 열쇠가 될 수 있다. 39개의 글로 창의적인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주는 ⟨크리에이티브의 시간⟩은 나이, 직업, 성별, 지능, 유전 등 생물학적, 환경적 영향에 상관없이 창의력은 하나의 태도라는 것을 시사한다. 창의력은 직업적 능력이기 이전에 삶의 태도다. 누구나 창작자인 요즘, 일상생활의 조직자인 인간은 모두 창의적이다. 


창의력은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자 의미를 찾는 도구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하며 창의성의 모습은 다시 한번 꿈틀대지만 스스로 책을 펼치고, 자발적으로 정원을 가꾸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탐구하는 인간은 창의적이다. 천재적인 예술가, 과학자, 운동선수만큼이나. 수억 개의 점에서 전에 없는 패턴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자발적으로 일상생활의 조직자가 되는 것. 그러면 날마다 쏟아지는 피드의 홍수 속에서도 나만의 '백과사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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