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낯모르는 시인들의 총서라는 '읻다 시인선'만의 매력답게 전혀 몰랐던 새로운 시인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길지 않은 창작 기간 동안 강렬한 발자취를 남긴 사가와 치카. 스물네 살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며 "모두 사이좋게 지내요.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저자의 시에서 느낀 첫인상은 진한 우울이었다. 아무리 작정하고 숨기려 한다 해도 활자에는 반드시 쓰는 이의 상태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도 마찬가지. 시 뒤에 숨겨진 시인이 보인다.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감상이 확장되었다. 치카의 일생을 알고 다시 읽으니 사랑의 상실과 고통,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들이 오싹할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와 더욱 진한 인상을 남겼다. 사실 한국어로 쓰여진 시도 어려운데 번역시는... 어려움이 배가 된다. 분명 다 읽었음에도 내가 이걸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있나? 싶어 몇 번을 거듭해 곱씹었다. 이해하기보단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방도라 생각한다. 시가 주는 느낌, 이미지, 리듬, 그 시만이 뿜어내는 빛깔을 온전히 느끼며 치카의 세계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 세상에 밤이 없다면, 책도 없으리라. 시인에게도 번역가에게도 밤은 축복이다. 마지막으로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시간, 그것은 밤이다. 품속에서 문지르는 돌처럼 문장을 매만지며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도 밤이다. 개도 나비도 지나가는 바람마저 잠든 밤에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190쪽)는 옮긴이와 저자가 생각하는 밤에 대한 교집합에 나 역시 공감을 더하고 싶다. 특히나 밤에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저자가 햇빛도 자주 쬐고.. 수면시간도 잘 지키는 삶을 살았다면 적어도 그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일은 피하지 않았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밤을 향한 사랑과는 별개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너무나 약하기에 고작 해를 못 봤다고 약해지고 밤낮이 바뀌었다고 아파진다. 무엇보다도 밤 동안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 어린 저자를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저자가 처한 상황, 상실의 마음은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 이후가 달랐다면. 그녀의 밤만큼 낮이 유의미했다면 또 어떤 시들을 써 내려갔을지 궁금하다. 모든 밤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밤만큼 낮도 사랑할 수 있길 소망한다.
+)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를 굳이 띄어 쓴 것과, 그것을 번역할 때 일부러 단어 사이에 간격을 더 넓게 배치한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읽지 않았다면 굳이 눈여겨보지 않았을 지점이다. 읽기의 방식이 확장되는 즐거웠던 순간! 두 도서를 함께 읽도록 선정해 주신 #읻다 최고, #넘나리 최고!
#책속의한줄 🔖
(83p.) 인간은 언제나 축축하고 어두운 수풀 아래를 지난다. 말없이, 무릎을 굽히고,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며. - <어두운 여름> 中
(95p.) 다시 씨앗들이 세계 구석구석에서 빛난다.
그야말로 시인이 시를 뿌리듯이. - <단순한 풍경> 中
(133p.) 그때 나의 감정은 거리를 누비며 춤을 추었다.
슬픔을 떨쳐낼 때까지. - <검은 공기> 中
(139p.) 사람들은 하늘에 고리를 던진다.
태양 따위를 잡기 위하여. - <출발> 中
(167p.) 나는 문득 꽃이 핀 줄 알았다
그것은 나이 먹은 한 무리의 눈이었다- <눈의 문> 中
(175p.) 치카의 시는 시종일관 무언가를 향해 몸부림치며, 잠을 잊은 파도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출렁거린다. 마치 시인의 유년 시절에 요동치던 홋카이도의 거친 바다처럼.
(183p.) 훌륭히 잘 조성된 토양마저 치카는 자신의 힘으로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단 한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온 인류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가 있듯, 단 한 사람에게 버림받아도 온 인류가 나를 버렸다고 느낄 때가 있다. 치카는 그런 기분 속에 살고 있었다.
(194p.) 결국 죽음을 노래하는 일은 생명을 노래하는 일과 이어져 있다. 치카가 노래하는 장송곡은 새로 태어나는 것들을 위한 찬미와 맞닿아있다. 저 계절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그 안에 삶과 죽음이 번갈아 불타오르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