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베짱이. 원래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그 결과로 풍요롭고, 놀고 먹은 베짱이는 굶어죽을 뻔한 내용. 아마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에게 숱하게 읽혀지고 가르쳐지고 연극으로 학습된 이 내용은 우리 세대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교훈"으로 알게 모르게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만 놀고 일하라는, 그래야 후일 一身의 편안함이 보장된다는 근거로 곧잘 인용되기도 하는 "개미와 베짱이"로 대변되는 교훈. 농경사회 또는 1차산업 문화에서는 결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당연한 진리, "수고하지 않은 자는 빵 먹을 자격도 없다"라는 교훈. 그래서 일 안 하고 놀러다닌 피노키오는 그 벌로 쉬지않고 일해야하는 당나귀로 변했었고, 맨날 아랫목에 누워 뒹굴대던 게으른 서방은 소탈을 쓰고 황소로 변해서 죽을 때까지 밭일을 해야하는 벌을 받았었다. 그런데 東西를 막론하고 존재했던 그 당연한 진리가, 시대의 변화를 타고 같이 변했다.
처음 이 책을 아이에게 읽어줄 때 내가 느꼈던 어딘지 모를 불편함. 그래서 한 번만 읽어주고 치워버렸던 프레데릭. 그런데 최근에 이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일이 생겼다. "이게 뭐야?"하고 휙 치워버렸던 내가 오히려 근시안적인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구세대는 아니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창의력, 자기주도학습, 코딩 등등.. 요즘 아이들을 붙들고 온갖 미사어구와 새롭게 만들어진 造語로 아이들을 그에 맞춰 새롭게 개발된 온갖 학습자료와 학원으로 내몰며 결국 원하는 것은 하나, "남들이 생각 못 한 걸 먼저 생각해봐"라는 것. 그런데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뇌가 충분히 쉬며 놀이를 통해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야 그런 창의성도 찾을 수 있다는 것.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기에 내 아들은 본인이 하고 싶다는 온갖 놀이시간으로 여가를 보내고 있다. - 물론 하기 싫다는 것을 내가 꼭 해야한다고 배우게 하는 것도 있는데, 그건 생명에 관계된 것이니 양보할 생각은 없다. 물론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뻔뻔한 거짓말로 당위성을 부여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엄마가 수영을 못 하니, 너가 수영을 잘 해서 엄마를 구해줘야 해"라는.. 하지만 결국 물에 빠져서 위험에 처해질 수 있는 공간이란 것이 바다 뿐이란 것을 생각하면 누가 누굴 구해줄 수 있겠냐만서도, 솔직히 수영을 배움으로써 그 절체절명의 순간 최소한 한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내 믿음은 변함이 없다. 아들에게 말해준 것처럼 그 생명의 주인이 실은 내가 아닌 아들 본인이란 것을 지금부터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놀아도 돼, 괜찮아"라는 내용이 동화로 변해서 내 눈 앞에 나타났을 때는, 작가의 의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불편하게만 느껴진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 이유는 어쩌면, 내 딴에는 아이의 시간을 존중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 입장에서 볼 때는 나도 다른 부모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일단 하고 봐" 식의 1차산업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쥐들이 열심히 일 하고 쉬지 않고 조직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노동을 할 때 프레데릭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 하겠다며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며 사색을 하고 놀이를 추구한다. 겨울에 모든 것이 눈 아래 쌓여버리고 모든 쥐들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무료할 때, 프레데릭이 나타나 친구들에게 시를 읊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그 어두운 곳에 봄의 온기와 화창한 날씨의 따사로운 태양빛과 다채로운 색채를 초대해준다. 오 프레데릭.. 너는 정말 시인이구나, 고마워 하는 친구들의 감탄. 그리고 그 나눔을 통해 함께 자칫 무료할 수도 있었던 시간들을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 유일한 존재, 프레데릭의 가치 창출. 인간사회에서라면 에코, 보통, 스필버그, 잡스, 저크버그 같은 이들이 되는 걸까. 순간 나부터 혼란스러워진다.
그래도 따지고보면.. 그 쥐들이 모두 프레데릭같았다면 그들은 따뜻한 공간에 모여 그렇게 시와 이야기와 노래를 즐길 기회조차 갖지 못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을 해서 1차적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기에 그 위에 그런 철학적, 유희적 놀이문화가 가능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인구의 구성을 본다면 기본 의식주문제를 해결하는 산업의 비율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꿔 말하면.. 결국 누군가는 의식주에 관한 일을 해야할 것이고 - 그것이 농사일이든 아니면 라면이나 과자회사 등에서 새로운 상품 개발이든, 또는 시멘트를 만드는 일이든 또는 그런 재료들을 모두 모아 새로 지을 건축물의 디자인을 고민하는 일이든 - 결국 부모로서의 내 역할이란 것은, 내 아이의 적성에 맞게 어디론가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조언해주고 기다려주고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떤 한가지 형태나 행동이 다른 것에 비해 그 가치가 덜한 것이 아니고, 결국 서로 서로 다른 것이니 그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사회의 다양성을 추구해나가야한다는 의도로 씌여진 동화책인 것일까.
사실 내가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는, 프레데릭의 "다름" 때문이 아니라 프레데릭이 그 "다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쥐들의 노동에 따른 결과를 같이 향유할 수 있었던 프레데릭의 "행운" 내지는 다른 쥐들의 "아량"에 대한 가치가 동화 속에서는 미처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 하다. 프레데릭이 그렇게 다른 쥐들의 아량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이 꼭 당연한 것은 아닌데, "무임승차"에 대한 불편함이 더 크게 다가와서 작가의 진짜 의도를 간과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따지고보면... 다른 쥐들은 "아량"을 베푼 것이 아니라 프레데릭의 "다름"을 인정해준 것 뿐인데 말이다. 아마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그 "다름"을 인정해줄 줄 아는 다른 쥐들의 넓은 시야에 대해 프레데릭도 역시 그들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해서이지 않았을까. 누가 누구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 잘 하는 일을 함으로써 사회가 다양성이 인정되면서도 함께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 그 부분에 대한 강조가 빠졌기 때문에 많이 불편하게 느껴졌었나 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결국 짧은 동화인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며 읽었기에, 오히려 아이에게 "괜찮아, 달라도 돼"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을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일방적으로 그 책을 폄훼해버린 것은 아닌가 살짝 반성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프레데릭을 읽으며 순간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가치관과의 차이로 인해 느꼈던 혼란스러움, 불편함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 조금은 해소가 된다. 여하튼 동화책으로 읽고나서 몇 년 뒤에 내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을 보면, 세상의 모든 책들은 허투로 대할 것이 아닌 듯 싶다. 여러가지로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