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에서는 스승의 역할을 했던 高僧이 사망한 경우 다시 어디엔가 還生을 해서 前生에 다하지 못 한 공부를 이어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求道를 해나감을 믿는다고 한다. 그렇게 還生을 한 高僧으로 인정받으면 린포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부여받고, 前生에 살았던 사원에서 제자들이 와서 모셔가서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스승으로 모시며 다시 공부를 계속 해나간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그런 린포체들 중에서 가장 높은 스승으로,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깨우쳤지만 인류를 사랑해서 衆生을 濟度할 목적으로 계속 還生한다고,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活佛이라고 한단다.
보고 싶어하면서도 극장까지 갈 시간은 안 되어서 마음에만 담고 있었던 다큐멘터리가 드디어 vod로도 볼 수 있게 나온 것은 행운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딱 두 사람이 주요인물이다. 꼬마 린포체와 그를 모시는 70대의 제자 老僧. 히말라야의 산마을에서 태어난 꼬마가 어린 나이에 린포체로 인정받으면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던 70대의 스승이 이제는 그 꼬마 린포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며 그들의 관계는 외견상 분명히 변했다. 하지만 그 안에 깊이 흐르는 두 사람간의 우정과 애정,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만 간다. 내용의 큰 줄거리는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으로 국경이 모두 막혀서 기존 사원에서 꼬마 린포체를 모시러 아무도 오지 못 하자 老僧은 큰 결심을 하게 되는데, 꼬마 린포체가 점점 전생에 대한 기억이 흐려져가는 와중에 더 늦기 전에 이제 조금 더 자란 된 꼬마스승 린포체를 모시고 직접 티베트로 바래다 주는 것. 그 먼 길을 떠나는 여정을 담은 내용이다.- 그 여정만도 2달이 넘게 걸렸는데, 감독이 그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촬영한 시간은 9년이라고 하니, 그 기나긴 시간동안 오롯이 카메라 앵글 속에 담아내기 위한 노고는 또 얼마나 들었을까..
이 다큐는 결코 종교의 얘기가 아니라, 나이 든 제자와 어린 스승 사이의 깊은 紐帶感과 사랑을 담아낸 것에 그 초점을 마추고 있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밭을 넘어 험난한 산맥을 걸어넘어가면서도 老僧은 결코 꼬마 린포체에 대한 미소와 애정어린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얼은 발이 행여 상할까 눈밭 위에 앉아 꼬마 린포체의 젖은 양말을 벗기고,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서 녹이며 그 냄새나는 발에 입을 갖다대고 입김을 불면서도 노승의 얼굴에는 결코 찡그림 한 번 없다. 살을 에일 것 같은 추위 속에 꼬마 린포체를 위해 장갑을 사주며 자신의 두 손은 얼은 그대로 비비며 길을 떠나는 노승의 뒷모습에서, 獻身이라는 두 글자가 사람의 모습을 한다면 바로 저런 것이겠구나 하고 바라봤다. 아무리 험하고 멀어도 수행을 위해 돌아가야하는 그 곳까지 닿아야하는 운명을 알기에 꼬마 린포체도 불평없이 노승을 따라 걷는다. 前生에 놓고 온 그 곳, 現生에서는 아직 가보지 못 한 그 곳, 떠나오기 전에는 꿈에서나 봤던 그 곳을 향해 걸어가며 이제 그 곳을 찾아 떠난 길 위에서 보는 꿈에서는 뒤에 놓고 떠나온 現生에서의 고향집과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는 어린 꼬마.. 환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삶이 진정 그러한 것이라면 이 얼마나 고달픈 求道의 삶일까. 어린 나이임에도 노령의 영혼을 짊어진 그 꼬마의 뒷모습을 보며 그 삶의 깊이가 짐작이 안 되어 보는 내내 먹먹했다.
마지막에 간신히 도착한 티베트에 꼬마 린포체를 홀로 놔두고 돌아서면서, 老僧이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영화감독의 말로는 9년에 걸친 촬영 동안 처음으로 본 老僧의 눈물이라고 했다. 풀밭에서 노승은 눈싸움을 제안한다. 눈이 어디 있냐는 꼬마 린포체의 말에, 있는 걸로 하면 되죠 하며 마치 눈이 있는 것인 양 즐겁게 눈싸움을 하다가 넘어진 노승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지를 못 한다. 어디 다쳤냐고 걱정하며 다가온 꼬마 린포체에게 그는 말한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해요.. 곧 터진 꼬마 린포체의 울음.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터진 노승의 울음. 그 울음 속에 담긴 슬픔의 깊이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오직 그 아이의, 도대체 몇 번에 걸쳐서 다시 태어나 걸어가는 求道의 길인지도 모를 그 한 자락에, 자신이 보살핌으로 도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며 오롯이 사랑으로 관심으로 보듬어 키웠던 그 어린 아이를 이제 홀로서기로 내려놓고 돌아서야 하는 그 老僧의 마음이 너무나 와닿아서, 같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나라면..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떠나가야함을 알고 보내줘야할 때, 그런데 그 아이의 나이가 고작 10여세에 불과한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아이일 때.. 나라면 그 아이와 이 생에서의 영원한 이별을 알면서도 그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가능할까. 그 때의 심정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종교의 얘기가 아닌, 한 영혼이 정말 순수하게 다른 영혼을 아끼며 헌신하는 사랑의 깊이를 볼 수 있었기에 그 슬픔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헤어짐을 슬퍼하며 서로 돌아서서 눈물을 흘릴 때, 老僧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잖아요.. 그래서.. 린포체, 정말 고마와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전달.. 그저 함께 한 순간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했다는 老僧의 마음이 전해져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老僧이 홀로 눈으로 덮인 히말라야 산맥을 걸어 넘어가는 모습 뒤로, 둘이 나눈 대화가 흐른다. 꼬마 린포체가 자신의 스승이자 보호자, 나이든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15년 뒤면, 내가 공부를 다 끝내겠죠? 그럼 스승님을 찾아서 돌아갈께요." 老僧이, "그럼 나는 아마 어린아이가 되어있을 거예요"(아마 나이가 많아서,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 할 거란 얘기인 것 같았다). 그러자 꼬마 린포체가 "그럼 제가 스승님을 모실께요" 하니까, 老僧이 "저를 모신다고요?" 하고 되묻는다. 그때 린포체가 한 대답이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예, 그럼 정말 행복할 거예요."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누군가에게 받은 아낌없는 사랑, 그리고 그 헌신적인 사랑을 알고 다시 돌려주고 싶어하는 마음,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마음. 그런 것들이 전해져서 정말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를 나눈 내 자식이라고 해도 내가 정말 저렇게 순수하게 다른 한 사람을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사랑하며 모든 것을 다 헌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린 린포체는 진짜 還生한 高僧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상대로 저 어린 린포체가 깨달은 그런 "감사하는 마음"을 나는 느껴본 적이 있나.. 하고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몇 번을 더 살아야 저런 중생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까.
꼬마 린포체의 俗世名은 "앙뚜"이다. 앙뚜가 정말 모든 공부를 잘 마치고 자신의 전생이 있었다고 믿는 사원에서 실제로 린포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꼬마 앙뚜가 정말 린포체이고 그들이 믿는 還生이 있다면, 이번 生의 끝에 老僧과 꼬마 린포체가 再會하지 못 한다고 해도 다음 생에서는 그 둘이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때는 꼬마 린포체가 원하는대로 老僧을 그렇게 따뜻하게 모시고 돌봄으로써 그 애정어린 관계를 다시 갖게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 생에서의 인연은 그들 모두에게 크나 큰 울림으로 남았을 테니, 이 인연이 꼬마 앙뚜가 더 훌륭한 스승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노승의 영혼에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깨달음으로 전해지면 좋겠다. 그렇게하여 그 둘이 이 생에서 안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나 역시 진심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