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드라마를 잘 안 보는데 우연히 "도깨비"를 보게 되었고 그만 그 재미에 폭 빠져버렸다. 특히 비쥬얼의 우월함이라고나 할까.ㅎ 덕분에 어제는 아이가 유치원에 등원한 틈을 타서 좀비물이라고 해서 관심도 없었던 영화 "부산행"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도입부분 좀 보고 등장인물들의 역학관계에 대한 학습이 끝나자마자 중간부분은 8배속으로 돌려본 뒤 끝 마무리 부분만 찾아보기는 했지만..(난 빨리감기 기능이 없는 극장은 앞으로도 가기 힘들겠구나 다시 한 번 느끼며.) 그리고 맨 뒷부분에서 가슴 뭉클한 장면이 나왔다. 자신의 감염사실을 인지한 순간, 변하기 전에 사랑하는 아이로부터 떨어져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실행에 옮기는 모습. 아빠 가지말라고 손목을 붙들고 끝까지 울며 매달리던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고 기차 뒤로 가서 울먹이다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처음 안아본 그 날을 회상하며 미소짓던 모습에서 나도 그만 같이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아이가 성장하면서 나도 모르게 옅어지고 흩어져버렸던 그 때의 그 감동, 기쁨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뭉클함과 아이에 대한 애정을 되살리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 그 아이 하나 잘 키워보고자 열심히 달려온 나날들인데, 정작 그 아이와의 추억은 남은 것이 없다면.. 그래도 그 애정 하나 확인하고 떠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 역시 마지막 순간에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고아열차는 그렇게 영화 부산행을 마치고나서 읽게 된 책이었다. 아이가 돌아오기까지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머리 식힐 겸 찾아든 "소설"이었는데 영화를 본 여운이 남아있어서일까, 비슷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1차세계대전 전후로 수많은 고아들이 생산된 그 시절, 미국에서도 고아열차라는 것이 있었다. 뉴욕에서부터 고아들을 모아서 태우고 서부로 달리며 멈춰서는 역마다 아이들을 내려서 세워두고 양부모(인지 무자비한 고용주일지는 아이의 운이고) 생각이 있는 어른들이 나와서 소를 고르듯, 말을 고르듯, 또는 보모를 고르듯 마음에 드는 애들을 先占하여 데려가는 것이다. 거기서 끝까지 보내질 집을 못 찾은 아이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뉴욕까지 되돌아가게 되고. 소설에는 주인공이 두 명 나오는데 한 명은 그렇게 고아열차를 타고 갔었던, 지금은 90대의 할머니, 그리고 또 한 명은 21세기에 부모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기에 정부의 주관 하에 위탁가정에 맡겨진 10대의 말썽쟁이 청소년이다. 우연을 통해 만나게 된 둘의 만남에서, 할머니의 다락방을 정리하며 함께 추억이 정리되어 나온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추억의 길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함께 걸어가본다.
아일랜드에서 가난해도 가족을 아끼고 지킬 줄 아는 조부모의 곁을 떠나서 가난하지만 꿈과 희망을 찾아 미국으로 부모를 따라 건너온 니브는, 추운 겨울 어느 날 집에서 난 화재로 가족을 모두 잃고 만다. 이기적이고 의존적이고 결코 어른일 줄 몰랐던 어리석은 어머니의 죽음에는 그다지 애정이 없기에 슬픔도 없었지만 더 이상 함께 할 가족이 없기에 떠돌아다녀야 할 인생은 고달프기만 하다. 그래도 니브는 강했고 영특했으며 몇 군데의 위탁가정을 거쳐 결국은 그녀의 진가를 인정하고 그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해줄 줄 아는 따뜻한 부부를 만나 양부모와 입양딸로 새로운 가족을 갖게 된다. 그 사이의 이야기들은 그저 잔잔한 흐름으로 흘러가고 그 사이사이 현재 시점의 10대 청소년의 이야기는 마치 데쟈뷰의 느낌으로 함께 조금씩 스며나온다. 역시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무책임하기에 부모는 커녕 어른으로서도 그 자격이 불분명한 엄마로부터 정부는 법적 미성년자인 아이를 떼어내서 위탁가정으로 보내고, 정부의 보조금이 탐나서 위탁가정을 신청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현재의 미국 현실을 감안한 구성으로 역시 그 아이도 잘 적응하지 못 하고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법적 성년이 될 날만 기다리는 나날들. 하지만 그렇게 둘이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위트있는 노부인의 회상과 그녀와 나누게 되는 따뜻한 인간관계를 통해 점차 마음을 열어가며 노부인의 추억을 함께 여행하는 소녀의 곁에서, 책을 읽어나가는 나도 함께 그 시절을 거닐며 마음이 점차 따뜻해짐을 느꼈다. 특히 소녀의 도움으로 잃어버렸던 가족과 재회하게 되는 노부인의 환희는 마지막장을 덮는 나까지도 같이 기쁨을 느끼게 해줬으니까.
생각해보면, 탄광촌같은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바다를 건너 새 대륙으로 넘어갔던 유럽인들의 모습이 그렇게 오래 전 일은 아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3등칸에 타고 있던 멜빵바지를 입고 자켓 하나가 갖고 있는 옷 전부인 사람들이 결국 그들 아니었나. 그렇게해서 건너간 꿈의 대륙은 모두에게 꿈의 실현을 허락하는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고. 설사 판자로 덧대어 만든 것이라도 나름 지붕과 벽이 있기에 비바람 피할 집 하나는 있다고 말을 한다해도, 죽음은 언제나 그 얇은 문 너머에서 바로 기다리고 있었던 녹록하지 않았던 삶들이 분명 그 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불과 백 년이 채 안 된 그 시대까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우리의 삶이 이렇게 평안해지고 문명의 利器들로 인해 "호화"로와진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불과 80년이 채 안 된 호사이고, 이 나라에 사는 우리에겐 50년이 채 안 된 사치임을 새삼 깨닫는다. 또 따뜻한 집과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가족, 그리고 언제나 두 팔 벌려 맞이해줄 부모가 함께 하는 가정이란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크나 큰 선물이자 감사할 일이고 그렇기에 함께 하는 시간들이 결코 허투루 흘려보내도 되는 순간들이 아니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마침 하원해서 돌아온 아이의 작은 몸뚱아리를 꼭 껴안고 녀석의 온기로 내 몸을 가득 채우며 녀석의 내음을 맡으면서 새삼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의 순간인지를.
고아열차,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열차. 하지만 유럽에서 유대인수용소를 향해 달렸던 죽음의 열차와는 달리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그리고 새 삶을 열어주었던 열차. 그 열차에 함께 올라타고 잠시 다녀왔던 90년 전의 과거로의 시간여행. 과거에서 깨어나 현재로 돌아오니 너무나 사랑하는 내 아들이 내 앞에서 조부모로부터 성탄절 선물로 받은 장난감을 갖고 즐겁게 놀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아이와 함께 하는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헤어지게 되지도 않고 또 소설에서처럼 언제나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하지 못 하는 가족이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새삼 감사함을 느껴본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난 뒤, 내가 지금 못 가진 것에 대한 후회와 한탄보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마음이 채워지며 오히려 눈물이 날 뻔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