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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응시하기보다 우선 듣는다.

타자의 말이 그의 외모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얼굴의 조형적인 매력은 '그 다음'이다.     _Alain Finkielkraut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영원성의 유일한 시간적 차원을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억으로 포획된 순간 속 시공간이야말로 영원성이 깃드는 자리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섭리 앞에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의미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유효하다. 비록 필멸의 유한함일지라도 나를 울리고, 설레게 한 그 순간은 영원으로 각인되어 가슴에 남는다. 찰라에 사라지는 순간과 변치않을 영원 사이에 길게 가로놓인 역설. 나의 몸과 세계를 엄중하게 운명짓는 유한함 속에서도 영원으로 새겨진 삶의 여러 순간. 그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행하는 만족의 차원을 넘어 내 앞에 마주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이에게 이야기 되어야만 순간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무심코 지나쳐 쉬이 잊혀 질 수 있는 당신의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하는 진지한 사유. 유한한 삶에서 밀려오는 끝 모를 허무와 고독을 잠시 밀어내어 여분의 자리에 끊임없이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생의 치열함.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언어로 환원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애써 노력해도 혼자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당신의 서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타인의 언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당장이라도 쏟아낼 말은 목구멍에 차도록 넘치지만 정작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진 이는 몇이나 될까. 비물질적인 가치마저 환산 가능한 세속적인 것으로 바꿔버리는 물화된 삶.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서사적 언어의 부재. 당신을 스쳐가는 말과 몸짓의 순간을 서사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되돌려 줄 수 있는 이가 없는 획일화된 세상에서 개인은 잘게 파편화된다. 이야기를 빼앗긴 개인은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 끝에 내몰린 채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생존을 위협받으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한 세상에서 나와 상대의 언어는 상실되고 그 자리에 야생의 동물성만 남는다. 서로에게 삶의 바깥으로 까마득히 이탈된 서사. 그리하여 사람 사이에 처절한 생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워진 상황은 삶의 허무와 피로를 가중시킨다. 이제 누군가의 말을 듣는 능력은 타인의 목소리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저 자신이 처한 불안한 앞날을 계산하기에 급급하거나 대상을 비교하여 힘의 우열을 가늠하기 위한 생존의 일차원으로 축소된다. 생의 처절함이 일으킨 새까만 먼지를 한껏 뒤집어 쓴 채. 슬프게도 타인이 조심스럽게 건네는 언어는 그 속에 깃든 진실함마저 온갖 그릇된 추측과 의심으로 끝내 좌절된다.

 

거부당한 서사의 언어 앞에서도 가치와 의미가 담긴 우리의 이야기를 삶 속으로 끊임없이 구현해야 한다. 밖으로 맴돌며 침묵하는 언어를 불러들이고 삶과 유리된 서사를 다시 되돌리는 일. 사람들의 삶의 윤곽이 단편적이지 않고 도드라지게 입체적이며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는 사실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상식에 안주한 식상한 이야기. 다수의 통념에 휩쓸려 함부로 재단한 이야기만으로 한 사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것은 진실이라기보다 오히려 편리함에 가깝다. 그리고 권태롭기까지 하다.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의 관점일뿐이며, 한정된 시간에서 벌어진 의외의 상황이나 조건이 빚어낸 작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수많은 능선으로 펼쳐진 삶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강요된 이야기에 삶이 박제되고 그렇게 경도된 일상으로 모조리 획일화하려는 세상. 그 속에서 오로지 하나라는 동일성에 매몰되어 서슴없이 자행되는 폭력. 그 폭력으로 얼룩진 검붉은 형상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서사를 조심스럽게 이끌며 당신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이와 그의 언어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런 당신의 서사는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며 당신에게 이야기되기만을 간절히 원한다.

 

사랑의 書, 그리고 당신의 서사. 권태와 생사가 난무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그 낯섦과 생경한 느낌으로. 나는 서사의 발견과 낯선 언어의 만남이야말로 행복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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