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세계와의 관계를 철학자다운 자기 중심성과 나타나는 상황을 아우른 세계파악 위에 세계와의 타협과 협력, 대치와 독립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관계 속에 파악된 존재를 죽음이라는 불안과 마딱드리게 하여 그 의미를 추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존재의미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세계파악과 거기서 선택한 자기 세계관이 있어야한다. 인간은 과연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을까? 세계관을 강요당하게 되었던 때를 지나 이제는 각자가 택하는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강제되어 살고 있는 시대에 들어온 건 아닐까? 그것이 마케팅이든 민주주의 압력이든...어려움은 세계관에 있어 우리가 끌려다니고 있었다는 인식의 부재가 아니라 주어지는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하는 능력 없음이 아닌가?
또 다음 단계인 죽음을 끌어안는 실존적 부딪힘을 우리가 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이데거만큼 강하지 못한 우리는(^^;)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실존적 확신으로 살다 막상 죽음을 맞을 때 자기 존재라고 믿었던 것이 이건 아니었구나라고 하게 될 것이 뻔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실 앞에 자기 개똥철학이 일시에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또다른 불안. 근거가 자기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살면서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전존재타자(신)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다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존재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전존재타자를 조정하거나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이 구원을 이루는 까닭은 절대타자의 독립적인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고 따르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불안을 제거하려는 경향으로 치닫는 루터교적 타락의 기독교를 힐난하였다.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자인 신과의 올바른 보편성의 관계가 아닌 실존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본 까닭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랑의 신이 계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건 마찬가지다. 신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불안을 존재자체로 이해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불안을 조장하는 사고자체를 진리 본체로 삼고 이것으로 세계를 보려하였다. 하이데거는 보이는 세계의 현상적 흐름에서 불안의 인간을 당연히 실존주의로부터 길러내고 이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려 발버둥칠 수 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개방형과 폐쇄형 세계관, 인격적과 비인격적, 사랑과 생존의 세계관 중의 선택이었다.
사랑의 신에 대한 세계관에는 또 다른 두 생각이 존재한다. [업다이크의 토끼]는 사랑을 향해 열린 태도만으로 충분히 전존재타자를 소유할 수 있도록 그는 약해지신 분이라고 믿는다. 이 키에르케고르적 불안의 인간은 그의 의지체계와 상관 없이 구원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며 그가 얻는 구원은 교회밖의 실존적인 것이라 여긴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므로 벗어나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며, 잊어버리고 있으면 어찌 될거라는 세계관이다. 이런 구원관의 혼란의 중심에는 인간의 행위와 예정이라는 주제를 실존적 입장에서 이해하려한다는 원인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내 실존을 이해해 주셔야 한다.] 사랑의 신은 실은 감정적이고 같이 사는 아버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분명 관계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계가 발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두고 보지는 않는다. 세계를 보는 방법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며, 죽음을 원래 모습대로 만만치 않게 여기게 하고, 동일한 인간 기준에 놓인 동료의 아픔을 느끼고 자기 힘을 넘어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태도를 기르게 한다. 끝은 불안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만만하신 분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 [긴장의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