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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의 고전읽기
  • 라셀라스
  • 새뮤얼 존슨
  • 9,900원 (10%550)
  • 2005-10-15
  • : 1,756

라셀라스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에티오피아의 왕자다. 하지만 그는 인간은 희망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모험과 진정한 행복감과 사는 것의 의미를 찾고자 풍족함을 버리고 떠난다. 새뮤얼 존스는 한 왕자의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찾는 여행기를 통해 여러 인간군상의 인생에 대한 시도들을 펼쳐보인다. 죽음이라는 한계를 알아차리는 것, 목적의 무의미함에 대한 고찰, 은둔은 결국 도피이며 이 곳의 삶의 진실만이 중요하다는 생각, 혼자 학문을 탐구하는 삶은 결국 점차 자기 오류에 매몰되어 간다는 것들을 마치 [어린 왕자]의 행성 탐험과 같은 여러 모험들을 통해 보여준다. 거창한 꿈을 품으며 떠난 여행은 결국 [밥벌이와 주어진 의무를 위해 일하며.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길임을 알려줌으로 끝난다.

 

희망은 광기와 맞닿아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인간은 희망이 부르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리 없는 계곡으로 발을 내딛거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건너뛰어보려한다. 진정 희망을 갖는 것은  희망에 미치는 것과 그리 멀지 않다. 희망은 분명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 희망으로 인해 인간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얼마나 많은 희망들이 인간을 고통의 광기로 몰아갔던가. 스탈린의 소련은 그 첫 희망이 인민이 주인되는 세상이었다. 인간을 정보와 폭력으로 무기력화 시키는 이 전제통치는 희망으로 인해 합리화되었다. 중세의 희망은 신이 통치하는 제국이었으며, 공자의 희망은 인간본성의 옳음으로 정돈되는 국가였다. 어떤 희망은 국민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국가, 또 다른 희망은 서양인에게 꿀리지 않는 떳떳한 동양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 희망들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차별과 고문과 학대와 살육을 낳았다. 인간은 큰 희망을 삼키면 자신이 미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타인을 억압하고 목표를 위해 희생시키는 것, 과정에서의 폭력과 인간을 얽어매는 규범들은 희망의 이름으로 덮여진다.  

 

결국 희망은 인간을 미치게 할 수 있는 있을 정도의 삶의 에너지이다. 반대로 희망이 없는 인생은 인간을 죽음으로 내 몬다. 가장 큰 무기력과 회의, 의미상실의 원인은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쾌락을, 자랑을, 오락을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고, 그 결말은 무의미이다.  희망이 사라진 인간은 또한 다른 인간을 먹이로 삼아야 한다. 비판과 정죄, 소외시킴과 타인을 궁지로 몰아가는 것을 통해 [희망없음의 무의미]를 없애려 한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말초적 우월감으로 무의미를 없애버리려하나 잠시뿐이다. 술은, 도박은, 오락거리는, 새로운 것들은 이것을 잠시 잊고 자연수명까지 무의미를 참아내게 할 뿐이다. 꿈이 없는 자에게 무의미한 인생이란 당연한 결론이다. 죽을 때까지 이걸 무시하는 것이 더 큰 싸움이다.  

 

 새뮤얼 존스의 관점은 진정 잘 [실현되는 희망은 이성으로 균형잡힌 희망]이라는 것이다. 새뮤얼 존스는 정신질환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 유전적으로 자신이 정신 이상에 걸리지 않을까 항상 염려를  가지고 살아갔다. 그의 어린시절 질환자인 아버지완 다른 옥스포드에 다니는 사촌과의 만남은 그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성공적 옥스포드 입학과 문학공부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한 옥스포드 중퇴와 라틴어 번역에 대한 스승의 냉담한 반응으로, 그는 희망 그 자체는 좋은 것이나 그 방법을 냉철한 이성 위에 두지 않으면 가지지 않았던 것보다 더 처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년시절의 경험으로 그는 이성적으로 추구되지 않는 희망은 가슴 아픈 실패를 가져옴을 깨달았다. 축제의 한밤의 열기와 같은 희망은 다음날 아침이면 아무 결실 없는 참담함을 남길 뿐이란걸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희망을 가지되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한 철저한 조사와 기획, 그리고 그 일 자체의 변수들, 궁극적 목표와의 연관성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처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 이 우화와 같은 소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궁극적 목표란  죽음 이후의 세계와 맞닿음이다. 인간의 소망이란 헛되며, 이성적이며 희망에 의해 공급되는 삶만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이 영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을 얻는다해도 이 땅의 것이므로 사라지고 말 것임을 이성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헛되다. 오직 이곳에서 내세를 준비하는 삶의 원천은 희망이  되어야 한다. 희망은 이성으로 뿌리박고 이성은 희망으로 작동되되 희망의 내용은 영원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59년 새뮤얼 존슨으로부터 우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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