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삽 타고 삼 만리
“생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이 대전제 아래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을 밝혀보겠다는 필자의 기획은 자못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필자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죽음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위해 세운 틀을 원용하여, 서양 미술사에 나타난 죽음을 역사적이 아닌 미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필자가 원용한 틀은 1. 우리의 죽음(중세 초기에서 중세 전성기), 2. 나의 죽음(중세 정성기에서 르네상스), 3. 멀고도 가까운 죽음(르네상스에서 바로크), 4. 너의 죽음(낭만주의 시대), 5. 반대물로 전화한 죽음(현대)의 다섯 가지로 분류된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머리말에서 독자로 하여금 유럽의 역사 속에서 죽음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첫 번째 목적)과 도상적 지표에 대한 초보적 이해(두 번째 목적), 죽음의 미학적 성취(세 번째 목적)을 의도했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는 동안 필자가 의도했던 세 가지 목적 중 두 가지는 어느 정도 실현된 듯 보이나 마지막 목적, 즉 독자로 하여금 ‘죽음의 미학적 성취’를 이루게 하겠다는 목적에는 다다르지 못한 것 같다.

혹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미학 오딧세이> 1,2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도 반복되는 그의 서술방식에 식상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그의 서술방식은 키치적 스타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또한 도상학 혹은 도상해석학에 관한 입문서를 한 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아니면 그에 준하는 교양서) 그의 해석도 그저 그런 수준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그가 의도했던 마지막 목적(이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인데, 밝혀 보겠다던 죽음의 美는 그의 글쓰기에선 실종된 듯 보이고, 초보적 수준의 도상해석학만이 누수된 미학적 분석의 여백을 땜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가 의도했던 두 가지 목적은 충분히 실현될 수 있을 만큼 재기발랄하게 꾸며져 있으며, 도록을 수집하기 위해 발품을 판 그의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